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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종대왕의 정신을 이어받아
날짜 2010-12-17 17:40:39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2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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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저서는 세종대왕 7대손이신 백강 이경여 선생과 그의 전후 가문의 이야기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점이 많이 있어 이에 소개합니다.

 

백강이경여 선생은 우암 송시열 선생보다 다소 앞선 세대이셨으나, 우암선생이 추앙하시었으며, 백강선생의 후손들은 모두가 사계 김장생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학통을 존중하시었고, 이를 현실정치, 행정에 반영하여 나가며 국가에 많은 이바지를 하였습니다.

 

 

 

 

세종대왕 가문의 500년 야망과 교육



저자: 이상주 저

출판사: 도서출판 어문학사

신국판, 340페이지, 14,000원,  978-89-6184-059-0  03900

 

 


세종대왕 직계후손들이 만주와 대륙정벌을 추진했다


 - 세종대왕 후손 중 최정예 엘리트 집단인 이경여 집안이 추진

 - 효종 숙종 때 이경여 3대, 북벌의 주역으로 활동하다

 - 한국판 뿌리, 세종대왕 500년의 가문사는 한국사다

 - 가문의 역사로 조선 상류층을 읽는다

 - 1만9천명의 세종대왕 최정예 후손들이 만든 조선의 역사



할아버지의 10만 정예병 육성, 손자의 12만 화기병 양성


세종대왕 직계 엘리트 후손들이 만주와 중국대륙 정복을 추진했다.

조선이 청나라와 일전을 벼르던 효종과 숙종 연간.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백강 이경여 집안은 대대로 북벌을 꿈꿨다.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는 10만 정예병 육성을 외쳤고, 아들 이민서는 이순신 김덕령 등 민족영웅 발굴 작업을 통해 북벌의식을 고취시켰다.

또 손자 이사명은 12만 화기병 양성의 구체적 계획을 제시했고, 이이명은 북방지도를 제작해 청나라와의 한판 승부를 별렀다. 조선 중후기 정국을 주도하면서 북벌의 의지를 불태웠던 이 집안은 세종대왕의 직계 후손이다.

세종대왕 후손의 500년 삶을 추적한 '세종대왕 가문의 500년 야망과 교육(이상주 저, 어문학사 발행)에 소개된 이 집안은 세종대왕의 서5남인 밀성군의 자손이다.


왕족인 전주이씨는 123계파가 있다. 이중에서 세종대왕과 신빈김씨 소생인 밀성군파는 3대연속 문형에 6정승 8판서를 배출해 조선 최고의 명문을 형성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전주이씨 중에 단연 으뜸이라는 의미로 '일밀성(一密城)'이라고 칭한다. 약 500만 명에 이르는 전주이씨 중에 밀성군파는 불과 1만9천여 명. 그만큼 초정예 엘리트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마지막 고종과 순종때까지 정국의 중심에 서 있던 이 집안의 가업중 하나가 청나라 정벌이었다.



북벌의 3세대 야망과 정지작업 그리고 마지막 손질


북벌주장 1세대격인 이경여는 노환으로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도 효종과 웅대한 꿈의 실천을 논의했다. 그는 북벌을 이상이 아닌 현실에서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연재해가 유난히 많았던 당시엔 재정이 바닥나 북벌에 성공할 수 없음을 적시하면서 효종의 노심초사를 경계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내부 단속을 충실히 하면서 긴 호흡으로 접근하자고 주장했다.

10만 정예병 양병도 우선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절대병력 차원에서 나왔다. 이에 대해 효종은 '갈 길은 먼데 날은 저물고~'라는 안타까운 심정을 그에게 답하기도 했다.


북벌주장 2세대격인 이조판서 이민서는 정신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

군사력과 함께 민족의 자긍심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절실함을 느끼고 민족영웅 발굴작업을 통한 국민역량 집결에 힘을 쏟았다. 이순신 김천일 김덕령 이종인 박광옥 등 임진왜란 때 활약한 영웅들의 일생을 재조명하면서 민족사관 정립에 앞장섰다.

하지만 이는 목숨을 건 작업이기도 했다. 그의 스승인 송시열은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덕령 장군의 향사(享祀)를 주선한다고 하니 과연 훌륭한 일이네. 그러나 염려되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김 장군을 죽인 세력이 마치 하늘을 뚫을 듯이 팽창하고 있네'라고 안위를 걱정했다.


북벌주장 3세대격인 병조판서 이사명과 좌의정 이이명 대에는 구체적인 방법이 나온다.

이사명은 숙종에게 12만 화기병 육성안을 올렸다.

그는 조선에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불과 3만~4만 명이라면서 '이미 훈련된 병졸 4만 명에 베를 바치는 사람 중에서 빠르고 용맹스러운 자 8만 명을 뽑으면 12만 명이 됩니다. 한 대(隊)에 화병(火兵) 2인을 지급하여 12번(番)으로 나눕니다. 1번(番)을 6천 명으로 하고 이중 3천 명은 서울에서 두 달 동안 훈련시키고, 3천 명은 지방에 배속시킵니다. 이들을 교대로 서울과 지방에 있게 하면, 한 해 동안 훈련된 군사가 거의 4만 명에 이를 것이며, 3년 안에 정예 12만 명의 화포병이 육성될 것입니다'라고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했다.

전투병력 확보를 제1 목표로 삼으면서 기존의 보병위주의 개념으로는 기마전술 위주인 청과의 결전에 한계가 있기에 화기병 양성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병조판서 출신인 이이명은 사행사로 간 청나라에서 첩보전을 방불케하는 작전끝에 만주와 북경일대를 그린 북방지도,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를 완성해 숙종에게 받쳤다.

이이명은 사행중 심양을 지나면서 효종대왕이 볼모생활을 하던 괴로움과 북벌을 이루지 못해 지극한 슬픔을 마음에 간직했다는 그는 전교를 외우며 세 차례나 되풀이 눈물을 흘렸다고 밝혔다.

유출이 금지된 청나라 기밀문서를 입수해 참조한 이 지도는 가로 6m64, 세로 1m44의 초대형으로 우리나라 북방과 만주와 북경으로 가는 성과 군사적 주요 거점이 그려져 있다.

이사명과 이이명은 북벌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상민은 물론 양방에게도 파격적인 세금징수를 주장해 지배층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또 철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이헌구는 평안감사 시절에 의주 등 서북의 국방의 요소에 산성을 전면적으로 개축하고 특별 무과시험을 실시하는 등 국방력 강화와 무예숭상 사상을 고취시켰다. 역시 청나라와의 한판 전쟁에 대비한 준비였다.



사화로 세종 직계 엘리트 가문 몰락, 북벌 좌절


하지만 북벌은 성공하지 못했다.

북벌의 중심인 효종이 41세에 급서한 게 큰 이유이지만 청나라와 일전을 준비하던 백강 이경여 가문이 기사환국(1689년)과 신임사화(1722년)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도 한 요인이다.

남인이 득세한 기사환국 때 서인의 강경파인 이사명이 사사되고, 소론이 승리한 신임사화 때는 노론4대신인 이이명과 이건명이 죽음을 당하고 이관명이 관노비로 전락해 유배되었다. 그 밖의 집안 남자들은 대부분 사사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대대로 서인과 노론의 사상가였던 이 집안은 두 차례의 사화에서 수십 명이 사상되거나 유배를 가는 치명상을 입어 북벌을 추진할 동력을 잃고 말았다.


왕족인 이 집안이 출세를 했던 것은 의외에 가깝다.

왕족은 일반인의 생각과는 달리 출세가 쉽지 않다. 왕권에 위협이 될 왕족의 정치참여를 막는 제도 탓도 있었고, 세도정치를 하는 외척의 견제 탓도 있었다.

그런데 밀성군파는 세종 때부터 순종 때까지 500년 동안 조선의 역사를 주도했다. 그래서 이들의 역사는 조선 상류층의 역사이고 이 가문의 역사는 바로 조선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의 손자, 연산군을 내쫓다


역사를 주도한 이 집안에서 임금을 보는 시각은 강한 군주, 도덕성 있는 군주였다.

왕이 허약하고 도덕성을 잃었다면 백성의 안위를 위해 교체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세종의 아들인 밀성군은 강력한 왕권을 추진한 세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 밀성군의 아들이자 세종의 손자인 운산군은 실덕한 연산군으로는 종묘와 사직을 수호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과감하게 임금교체를 추진하고 성공시켰다.

신임사화때 희생된 이이명과 이건명은 경종과 영조 사이에서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선왕인 숙종의 고명에 따라 영조를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피의 숙청을 당해 집안이 멸문의 지경에 이르기도 했으나 가문에 일관되게 내려온 임금이 임금다워야 충성하고, 선왕의 고명을 죽음으로 지켜야 하다는 원칙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 집안의 또하나의 특징의 실학적 사고다.

변화하는 현실에 유연성을 보였던 이이명은 몇 번의 북행사절(北行使節)을 통해 접한 서양의 발달된 문물의 수입 방법을 생각했다. 천주교·역산(曆算)·천문·지리에 관한 책을 국내에 반입했고, 만주와 화북지방이 포함된 지도를 제작하는 등 실증적인 지리·전산(田算)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홍대용 보다 100년 앞서 서양인 선교사와 가장 많이 접촉한 이기지


그의 아들 이기지는 좀 더 유연한 사고로 깊은 천문지식을 바탕으로 북경의 서양인 선교사들과 대담을 통해 앞선 문물을 조선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이기지는 역대 조선인중 북경의 선교사와 가장 많이 접촉한 인물이다. 그는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카스텔라를 대접받은 감흥을 연행록에 남기기도 했다.

조선 선비로서는 최초로 남긴 카스텔라의 평은 이렇다.


서양 떡 30개를 먹으라고 내왔는데 그 모양이 우리나라의 박계(薄桂-가늘고 엷은 햇가지)와 비슷하게 생겼다. 입안에 넣자마자 녹았는데 매우 부드럽고 감미로왔다. 참으로 기이한 맛이다. 재료는 사탕과 계란, 밀가루 등이라고 한다. 선왕인 숙종이 말년에 음식에 물려 색다른 맛을 찾은 적이 있다. 이 때 어의 이시필(李時弼)이 예전에 연경에 갔을 때 심양장군이 병을 치료하면서 계란 떡을 먹었는데, 맛이 지극히 부드럽고 기발하였고 중국에서도 진귀한 음식으로 여긴다고 답했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었는데 끝내 좋은 맛이 나지 않았다. 내가 한 조각을 먹자 저들은 곧바로 차를 내왔다. 빵을 먹은 뒤 차를 마시면 소화가 잘되어 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암연기>


이이명과 이기지의 활동시대는 북학파 보다 한 세대를 앞서고 있다.

이기지의 아들인 이영유도 음악을 통한 백성교화, 즉 음악을 통한 통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운소만고에서 '백성을 깨우치고 교육하며 풍속을 바꾸는 데는 음악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표현했다.


이 집안에선 여인들의 발걸음도 눈길을 끈다.

이 가문에서는 남녀의 역할 분담은 분명했지만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경여는 자녀들에게 한 훈계에서 부인을 반드시 예로서 대하고 실없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스토리텔링 교육으로 손자 4명을 정승과 판서로 만든 할머니 


인격체로서 대우 받은 이 가문의 여성은 스토리텔링에 의한 논리성 함양 교육으로 자녀를 양육해 명문가문의 밑그림을 그렸고, 의로운 일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남편이 과감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경여의 아내 풍천임씨는 손자들을 스토리텔링으로 교육해 3명의 정승과 1명의 판서로 만들었다.

또 3대 연속 문형을 만들었다. 그녀가 항상 무릎 위에 앉히고 옛이야기와 할아버지의 일화를 대화식으로 들려주었던 손자중에 이사명이 병조판서, 이미명과 이관명, 이건명이 각각 좌의정에 오른 것이다.

특히 아들인 이민서 손자인 이관명 증손자인 이휘지가 3대 연속 문형에 오른 청사에 빛날 업적을 남겼다.

그녀의 교육법은 백강공묘비에 적혀있다.

첫째가 근면함이다. 스스로 일찍 일어났고, 어린 손자라도 늦게 일어나면 꾸중을 했다.

둘째가 여색 경계다. 자식이나 손자가 술을 마시거나 부녀자와 가까이 하면 엄히 훈계를 했다. 옛 고사를 인용해 이해의 폭을 넓혔다. 요즘 말로 단순훈계가 아닌 스토리텔링을 함으로써 쉽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했다.

셋째가 실천궁행이다. 그녀는 출산 후 10일 만에 손님을 맞았다. 또 겨울에 손등이 얼어터지도록 일을 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찾는 이에게 성의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그게 집안을 일으키는 힘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자란 손주와 자식이 조그만 태만하면 질책을 멈추지 않았다. 큰 인물이 되려면 자신을 닦아야 함을 역설하곤 했다.

넷째. 독서다. 임씨부인은 손주들에게 할아버지인 이경여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다. 나랏일에 바쁜 이경여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정무에 임했다. 매일처럼 피로했겠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책을 읽었다. 손주들에게 책 읽는 모델로 할아버지 이경여를 제시한 것이다.



사대부의 여인, 임금에게 두 차례 한글 편지로 감사와 항의를 하다


이 가문 여성 역할의 정점은 이이명이 아내 정경부인 김씨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녀는 당당하게 영조에게 두 차례의 한글 편지를 보냈다. 한 번은 감사의 편지였고, 두 번째는 항의의 편지였다. 사대부의 여성이 임금에게 한글편지를 보내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그런데 그녀를 그 일을 했고, 또한 내용이 지극히 논리적이어서 보는 이들을 감탄케 했다.


이 가문에선 입신양명 외에 몇 가지 독특한 효의 관점이 있었다.

첫째, 효 보다 충을 앞세웠다.

상당수 사대부들은 국난의 위기에서도 효를 우선시 한 경우도 많았다. 이에 비해 이 집안에선 나라와 가족의 갈림길에서 나라를 택한 사례가 많다.

이경여의 어머니 진천송씨는 왕의 피란을 호종하는 아들이 하직인사를 한 뒤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자 '부모에 앞서 임금과 나라'라고 아예 못을 박는다.

둘째, 효를 위해선 체면을 버렸다. 나이 쉰이 된 이민장은 칠순의 어머니를 위해 아이들과 같은 행동을 하곤 했다. 마치 주나라의 효자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세가 되어서도 어린애 흉내를 내 어버이를 기쁘게 했다는 고사인 노래지희(老萊之戱)를 연상케 한다.

셋째, 귀양살이의 극한 상황에서도 효심을 잃지 않았다. 시할어니 시어머니 며느리 등 여인 삼대가 부안에 유배됐을 때 며느리인 안동김씨는 위의 두 여인에게 옛이야기를 읽어드려 시름을 덜게 했다. 이이명은 작고한 장인이 심은 매화와 대화를 하며 효도를 다했다.



세종대왕 가문의 세 가지 독서관


세종가문인 밀성군 집안의 독서관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성인으로 가는 수련의 과정이었다. 이경여는 큰아들 이민적에게 `네 나이 열다섯인데 아직 학문을 이루지 못했으니 크게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시간은 덧없이 빨리 흐르고 청춘은 다시돌아오지 않는데 청소년기에 공부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는 질책이었다.

둘째, 굶어도 책은 팔지 않는 것이었다. 이인상의 아내는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책 만큼은 지켰다. 이인상이 시와 서 그림에 모두 능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책을 목숨처럼 여기는 가풍 덕분이었다.

셋째, 부단한 노력이었다. 문과에 장원한 이민적은 아들에게 지독한 독서를 시켰다. 밥을 먹은 뒤 소화가 되기만 하면 책을 읽게 했다. 자신이 장원급제에 이어 큰아들 이사명의 장원급제 손자 이기지의 장원급제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벼슬에는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우의정 이건명은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기 전 유언에서 '글을 열심히 읽어 마음을 닦되 출세에는 연연하지 말라'고 했다.

이건명의 형으로 좌의정을 지낸 이관명도 노비로 전락하고 아내에게도 신경을 써 주지 못한 것은 벼슬 때문이라고 후회했다.

이병인은 아예 과거를 보지 않고 독서를 하며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벼슬길은 필히 정쟁에 휘말리고 이는 자신의 삶도, 가문에게도 누를 끼칠 수 있다는 현실을 바로 본 것이다. 그래도 이 가문에는 벼슬은 하지 않되 글은 게을리 읽어서는 안된다는 철학은 분명했다.

하지만 출사를 하면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멈추지 않았다.

숙종 때 이민적은 열 살 왕세자의 혼례추진에 대해 강하게 비판을 했고, 경연을 자주 거르는 현종에게 비판의 강도를 높이면서 '운동'을 청하기도 했다. 임금의 허약은 운동부족에서 온다는 비판이었다.

암행어사로 나간 이관명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은 숙종을 분노케 했다가 한 자리에서 3계급 특진이라는 훈장으로 돌아온다는 야담을 낳게 하기도 했다.

이관명은 어전의 재판에서도 감성이 아닌 논리로 접근해야 해야 실체적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해 공감을 얻은 바 있다.



세종대왕 직계 엘리트들의 혼맥


세종의 아들인 밀성군 집안을 통해 조선 상류층의 혼맥도 살펴볼 수 있다.

밀성군파의 현달한 인물은 백강 이경여 집안에 집중돼 있다. 상신 6명에 3대 대제학, 8판서가 모두 이경여 가문이다. 세종대왕의 고귀한 기품이 백강 집안에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백강 집안은 세종의 직계 후손이라는 명망과 함께 처족의 화려함으로 더욱 빛났다.

백강 가문의 처 집안은 원두표 장 유 김만중 김창집 등 당시 사회의 최상류층이 총망라되었다. 처의 증조부까지 포함한 정2품 이상의 처가는 덕수 장씨, 안동김씨, 광산김씨, 풍천임씨 ,경주김씨, 연안이씨, 기계유씨, 안정나씨, 은진송씨 등 30여개 성에 이른다.

여러 성씨 중에서도 핵심은 청음 김상헌의 후손인 신안동 김씨였다.


이경여의 5대손으로 정조 때의 인물인 이영유는 자신의 문집인 운소만고에서 '우리 집안은 신안동 김씨와 200년 동안 도타운 정을 나누고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100여년 동안 신안동김씨와 백강 가문은 깊은 혈연관계를 유지한다. 조선 중기부터 근세까지 300년 동안 겹사돈 관계를 맺으면서 정국과 조선의 사상을 주도한 것이다. 문장가가 많은 광산김씨도 주요한 처족이었다. 이민장의 사위가 대제학 김진규이고, 이이명의 아내가 역시 대제학 김만중의 딸이다.


백강 이경여 가문은 30여 성씨 중에서 정2품 이상의 품계에 있는 집안에서 50여차례 규수를 데려왔는데, 이중 13차례를 신안동김씨 가문에서 배필을 맞았다. 다음이 4차례인 대구서씨이고 광산김씨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배위의 직계 3대 선대의 대표 벼슬은 판서로 18곳이나 된다. 다음이 상신 9곳으로 영의정 6곳, 좌의정 2곳, 우의정이 1곳이다. 백강 가문 중에서도 좌의정 이건명 집은 28차례나 정2품 이상의 집안과 혼인을 했다.



세종대왕의 여인, 비구니가 되다


온화하게 아름다운 덕으로 인후한 공자를 많이 낳았습니다.

왕후를 공경하고 여러 후궁과도 잘 지내 왕가의 번성에 큰 일을 하였습니다.

매사를 은혜롭게 하고 겸손함으로써 왕실을 화목하게 했습니다.

임금이 탄 수레가 처음 멈추니 무덤 앞에 선 돌짐승이 반겼습니다.

바라건데 이 잔을 흠향하시고 세대가 아득하다 하지 마소서. <홍재전서>


한 후궁을 300년 뒤의 왕이 추모한 내용이다.

후궁은 조선 4대 왕인 세종대왕의 부인인 신빈 김씨이고, 왕은 조선의 22대 군주인 정조다.

1797년 8월17일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의 능에 참배하기 위해 화성인 수원에 가다 인근에 신빈 김씨의 묘가 있음을 듣는다. 왕실을 튼튼하게 한 세종을 모범으로 삼으려던 정조는 신빈 김씨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화성 남양리를 지날 때 승지를 불렀다.

"신빈 김씨의 묘에 치제를 하라."

승지는 그녀의 묘에 술을 올렸다. 그리고 겸손한 인간성을 칭송했다.


300년 뒤의 임금에게도 기억되는 그녀의 매력은 일편단심이었다.

이는 조선 최고의 명문으로 성장한 자손들에게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임금 세종과 신분을 뛰어넘는 세기의 로맨스를 펼친 그녀는 세종 사후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역대 왕들이 환속해 편히 살 것을 명했지만 세종을 잊지 못해 평생을 절에서 살았다.

"세종대왕으로부터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세상 일을 잊고 대왕을 추모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신빈김씨가 속세로 나와 살라는 단종에게 한 말이다. 신빈은 세종대왕이 승하하자 머리를 깎고 자수궁에 들어갔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있었던 자수궁은 한때 5천여명의 여승이 거주한 최대의 승방이다.


1661년 현종 때 헐렸으나 세종 때는 많은 여승이 머물러 시름을 덜고 있었다. 신빈이 자수궁에 들어가자 아들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신빈은 6남을 두었다. 막내 담양군이 결혼 전에 죽었으나 다른 아들은 장성했다. 아들들이 모시겠다고 읍소를 했지만 신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에 큰아들 계양군은 문종과 단종에게 연이어 어머니의 환속 어명을 호소했다. 문종과 단종은 아들의 뜻에 따를 것을 명령했으나 신빈은 세종대왕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마치겠다고 한 것이다. 신빈은 세종의 후궁이므로 단종에게는 할머니다.

할머니의 간곡한 거절에 단종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신빈이 영화로운 삶을 뒤로 하고 머리를 깎은 이유는 은혜갚기였다. 세종에 대한 그리움이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이다.

세종에게는 여인이 많았다. 소헌왕후를 비롯해 작위를 내린 부인만 여섯이고, 자녀는 18남 4녀다.

그래서인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사서엔 세종이 한 여인에게 유난히 정을 듬뿍 주었다는 구절은 없다.


그러나 세종이 가장 정을 쏟았던 여인을 짐작할 수는 있다.

아마 신빈 김씨일 것이다.

신빈 김씨는 소헌왕후의 지밀 나인이었다.


끊임없이 발 길을 왕후에게 돌리던 세종의 눈에 참하고 총명한 중궁의 나인 김씨가 보였다.

예의 바르고 고개를 숙일 줄 알았던 김씨는 중전을 지성으로 모셨다.

이에 중전도, 세종도 그녀를 귀여워했다.

그녀는 결국 21세 때인 세종 8년에 왕의 성은을 입어 스물 두살에 첫 아들인 계양군을 낳았다.

이 때부터 신빈 김씨는 12년 동안 모두 6남 2녀를 낳았다.

이는 조선의 후궁중 가장 많은 자녀이다. 아들만 따져도 두번 째로 많다. 성종의 후궁인 숙의(淑儀) 홍씨는 일곱 왕자를 낳았다.

12년 동안 꾸준히 왕을 모신 신빈 김씨. 줄곧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한 남자를 사로잡은 여인.

그러면서도 그녀는 왕후의 눈 밖에 나지 않았다.

이는 세종의 처신과 관계가 깊다. 세종은 신빈 김씨를 총애하면서도 소헌왕후 심씨에게 애뜻한 사랑을 계속 보였다.

신빈은 자신에게 사랑을 듬뿍 준 세종과 피붙이 같은 정으로 대해준 소헌왕후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비구니가 된 것이다.



<저자 소개>


이상주李相周

20여 년 동안 글을 쓰고 있는 신문기자다. 한국의 역사와 인물들을 깊게 연구해 정보와 흥미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글쓰기 작업을 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인물들의 사상 및 정치철학을 대중에게 알리는 작업에 정열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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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이주관 세종대왕의 정신을 이어받아 2010-12-17 2500
72 이주관 그빛을 들어내지 않음이여! 2010-12-09 1879
71 이주관 갈등의 극복 2010-12-04 1598
70 이주관 不得志면 獨行其道 하리라 2010-12-01 1544
69 이주관 실천하매 천명을 어기지 않으니 2010-11-29 1698
68 이주관 중용의 "몰입원칙"에 대해 2010-11-17 1705
67 이주관 죽음(死亡)을 넘어서 2010-11-13 1696
66 이주관 썩지 아니하는 것 2010-11-07 1847
65 이주관 訓民正音과 한자문화유산 2010-11-06 1884
64 이주관 성리학과 시대정신(Zeitgeist) 2010-10-30 1719
63 이주관 "신임사화"의 교훈 2010-10-29 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