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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死六臣墓碑銘~노포 이휘지 선생
날짜 2011-07-04 11:59:29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1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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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과 같이 사리사욕이 앞을 가리어 참됨을 위하여 삶을 던지는 풍토가 사라져감으로, 가치있고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사육신의 충절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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果川 六臣墓碑(과천 육신묘비)


有明朝鮮國 六臣墓碑銘幷 序 (유명조선국 육신묘비명병 서)
大宗伯太學士 趙觀彬撰 集唐顔眞卿書 (대종백태학사 조관빈찬 집당안진경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노량진을 지나 남향 언덕에 묘역을 함께 한 다섯 무덤이 있다.

 

각기 작은 돌에 성씨만 쓰여져 있어 마치 부인의 묘표와 같은 데도 그곳을 지나는 사람은 다 말에서 내려 손으로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만고 충신의 무덤이다.’하니,  곧 이른바 육신의 묘이다.

 

육신(六臣)은 참판 박팽년, 승지 성삼문, 교리 이개, 사예 유성원, 참판 하위지, 도총관 유응부이다. 


 세종과 문종을 섬기면서 은총을 받았고, 단종이 나라를 내놓을 때에 와서는 제공이 의리를 내세워 순절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추강 남효온의『병자육신열전』에 실려 있는데,

박공(朴公)의 못가에서의 결심과, 성공(成公)이 옥새를 가슴에 안고 통곡한 것과, 이공(李公)이 현릉의 송백을 슬퍼한 것과,

유공(柳公)이 집현전 조서를 통곡한 것과, 하공(河公)이 녹을 모아 창고에다 둔 것과, 유공(兪公)이 열이 식은 쇳조각을 땅바닥에

던진 일 등에서 그 실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광묘가 후세의 충신이라고 칭찬한 말은 해와 별에 게양하여 우주에 전하기에 충분하고, 선· 효 두 왕조에서도 충성을 가상히 여겨

후손을 녹용한 은전이 있었다. 우리 숙종대왕은 예 사람의 은혜에 감사하고 높이 보답하는 뜻에 더욱 마음을 쏟아,

기미년에 노량진에서 열무할 때 강 건너 묘를 바라보고 그 묘역을 손질할 것을 명하였고, 많은 선비의 소청에 따라 교 곁에 사우를

세워 병향하였다. 신미년에 장릉에 거동하면서 지나다가 다시 관직을 도로 주고 제사드릴 것을 명하였으며,

사액을 민절이라고 하사 하였다. 무인년에 예전에 거행하지 못한 예를 닦아 단종을 태묘에 부묘하고, 또 관원을 보내 육신의

사당에 제사하였다. 이리하여 단종의 지극한 덕은 역대의 조상에 배향이 되고 제공의 높은 충성과 큰 절개가 동시에 빛이 나

마침내 유감이 없게 되었다.


 

 아! 이 다섯 묘는 이미 박(朴)· 유(兪)· 이(李)· 성(成) 이란 성씨로 표석이 세워졌으니 육신(六臣) 중 네 공(四公)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하나 성씨가 있는데 이는 성공(성공)의 아버지 `승(勝)`으로서 같은 날에 화를 입어 이곳에 묻혔다고 하며,

하공(河公)의 묘는 영남 선산에 있는데 몸의 일부만 묻혔고, 유공(柳公)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듣지 못하였다. 대체로 그 당시

화가 일어났을 때 가족까지 전부 몰살되어 제공의 시신을 거둘 사람이 없는 상황일 때에 어떤 중이 그 시신을 업어와 이곳에

묻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매월당 김시습이 묻었다고 하는데, 그때는 사태가 다급하여 일을 제대로 격식을 차리지 못해 무덤이

서로 뒤바뀌어 어느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하공(河公)과 유공(柳公)의 무덤 또한 이 중에 섞여 있지

않은 줄을 어찌 알 것인가?

 

 아!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은 것은 대의이다. 그러나 국명이 바뀌지 않고 천운이 정해졌을 때는 제환공의 관중이나 당태종의

위징과 같이 된 자도 예부터 몇 명이 있는데도, 제공은 그 때를 당하여 차마 선왕이 어린 것을 부탁한 뜻을 저버리지 못해,

능히 한번의 죽음을 결정하기를 명나라 방효유 등처럼 하였으니, 세운 그 절개는 뛰어나다고 할만하다. 무인년에 있는 국가의

전례가 시행됨에 있어서는 더욱 제공의 죽음이 끝내 임금의 뜻을 감동시킨 하나의 큰 도움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충신의 피가 묻힌 곳이 여러 해 동안 황폐하였으나 때에 따라 숨겨지고 드러난 것이 국시와 함께 정해지니 어찌 슬프고

또 기묘하지 않은가.  육신(六臣)의 후손은 오직 박공(朴公)의 유복손 만이 다행히 화를 모면하였는데 몇 대를 지난 뒤에 비로소

녹용되었다. 7대손 익찬 숭고가 이곳의 무덤을 증축하고 의심나는 것을 분간하였으며, 금상 정묘년에 연신의 아룀에 따라

경기관찰사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듬어 묘도에 세우게 하니 민절사 유사인 장보 민백흥 · 심 우 등이 나에게 거기에 기록할

글을 부탁하였다. 이를테면 여러 선생의 의열은 천하 후세에 떳떳하게 할 말이 있으니 비석의 있고 없고가 무슨 영향이

있겠는가마는 성주께서 충성을 표창하고 여러 선비가 간절히 요청하였으며,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비석 끝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삼가 그 사적을 서술하고 명을 덧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윤기는 오륜이 있고 신하의 절개는 두 임금 없는데, 성조께서 이를 배양하여 후손에게 끼쳤도다.


그 중에 육신은 단종 위해 죽었으니, 꺼려할 것 뭐 있나 곧은 글 사책에 올려있네.
노량진 언덕바지에 줄지은 무덤들, 빗돌에 이름 없어 몇 세대 의문 남겼네. 노인이 분명타 하는 말 신빙하기 충분한데,
오랜 동안 묘역 숨겨져 시신 끝내 보전되었네. 하공(河公)은 장소가 다르고 유공(柳公)은 흔적조차 없으니,
다급한 때 있던 일이라 그 까닭 알 수 없네. 어쩌면 이 두공도 이 속에서 섞여 있지 않을까.


사철에 제사가 없으니 의사가 눈물 뿌렸네. 우리 숙종 임금 충절을 포장하여, 무덤 바라보고 추모하여 사당 세워 제향 올리니,
밝은 태양 환히 비춰 이운 풀잎 생기 돋고, 노릉을 추존하니 신이며 인간 마음 흡족하네.
훌륭하신 단종의 덕 어찌 종묘 배향 않을손가. 임금 신하 한 몸 되었으니 충신이로다 공들이여,
옛적엔 금기되었으나 이제는 높이 칭송받고, 예전에 황폐한 데를 나중에 정성껏 받들었네.

 
아울러 제물 올리니 박취금의 후손인데, 큰 비 세우라 임금님 명하여 옛법을 계승하였네.

관찰사는 돌을 다듬고 사림은 역사 감독하니,  남추강 육신전 기록에다 정론은 변하지 않음이로세. 빗돌에 크게 새겨

강가에 높이 세우니,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저 멀리 영월과 통하누나.

 

 아! 육신묘비문이 완성된 것은 영조 정묘년이었고, 그 후 2년이 지난 무인년은 곧 장릉이 복위 된지 주갑이 된 해이다.

임금은 명하여 박공(朴公)· 성공(成公)·이공(李公) ·유공(柳公)· 하공(河公)에게 이조 판서를, 유공(兪公)에게는 병조 판서를 증직하고, 박공(朴公)은 충정, 성공(成公)은 충문(忠文), 이공(李公)은 충간(忠簡), 유공(柳公)은 충경(忠景), 하공(河公)은 충렬(忠烈), 유공(兪公)은 충목(忠穆)이라 증시(贈諡)하였으며, 을미년에는 임금이 박공의 후예가 서울에 와서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명하여 그 마을을 정표하였다.


 당저 정유년에는 영남도신에게 명하여 하공(河公)의 마을을 정표하였다. 이는 숙종조에 공의 종자로 그의 후사를 추정하였는데

그의 집이 안동에 있으므로 이때 이 명이 내린 것이다.

 
 무술년에는 민절사에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각 성조의 충의를 드러내고 포장한 것이 이렇듯 지극하니 제공의 크고 높은

명절은 천추만대에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용머리 거북받침의 있고 없고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성고가 특별히 현각을 명한 후의를 아직까지 받들어 게양하지 못하여 사림의 한이 되고 있으므로 민절사 유사 이동직이 그의 동료와주선하여

돌을 새기고 박공(朴公)의 사손(嗣孫) 전현감(前縣監) 기정(基正)이 정성껏 도와 일을 마치니, 아! 그 또한 훌륭하다.

 

 나는 일찍이 노량진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무덤의 수목이 울창하여 지난날의 황폐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이제 큰 비석이 또 높이

서게 되니 어느 누가 충신의 무덤인 줄 모를 것 인가마는 더욱 존경과 감탄이 터져 나오는 것은 참으로 세 성조에서 높이 보답하는

후덕 때문인 것이니, 이 점은 마땅히 태사씨의 큰 글이 있을 것이다. 이제 장보의 부탁에 따라 대강 정묘년 이후 나라의 은전과 비

를 세우게 된 전말을 위와 같이 서술한다. 

 
원임 우의정 이휘지(李徽之)는 삼가 기록함

숭정기원후 세 번째 임인년 (정조 6, 1782년) 월 일 세움

 

果川 六臣墓碑
有明朝鮮國六臣墓碑銘幷 序
大宗伯太學士趙觀彬撰 集唐顔眞卿書

維漢師迤南越露梁津向午之岸有五塜同域各樹片石只書姓氏如歸人之表而過者皆下馬指點咨」
嗟曰 萬古忠臣之葬卽所謂六臣墓也六臣者叅判朴公諱彭年承旨成公諱三問校理李公諱塏司藝」
柳公諱誠源叅判河公諱緯地都摠管兪公諱應孚
是巳事 世宗 文宗被 恩遇及 端宗遜國諸」
公抗義以殉事載南秋江孝溫丙子六臣列傳而朴公臨池之矢成公抱寶之哭李公之感 顯陵松栢」
柳公之慟集賢絲綸河公貯祿而置室 兪公取鐵而投地比可以槩其實蹟矣 光廟後世忠臣之褒有」
足以揭日星而埀宇宙 宣 孝兩朝亦有愍忠錄後之典而惟我 肅宗大王尤致意於曠感崇報之」
義已未閱武露梁隔江望墓命修其隧道因多士䟽請傍其墓立祠幷享辛未 幸章陵輦過又 命」
復官致祭 賜祠額曰愍節戊寅修闕章祔 端宗于 太廟又遣官祭六臣祠於是乎 端宗至德永」
配 列祖而諸公之危忠大節與有光而遂無憾矣噫惟茲五墓旣表以朴兪李成姓氏則其爲六臣中」
四公無疑又有一成氏此則成公之父勝同時被禍葬此云而河公墓在嶺南善山只藏一軆柳公墓則」
獨不聞所在盖當日禍作家族盡夷無人收骸有僧負其屍之或云梅月堂金公時習而維時猝急事多未遑堂斧相錯䵝䵢難辨則河柳之葬亦安知不混於此中耶嗚呼臣爲君死大義也然其於國命無」革天運有歸則爲齊桓之管仲唐宗之魏徵者從古幾人而諸公則當其時也不忍負 先王託幼之意能辦一死如 皇明方孝孺諸人其所樹立可謂卓絶及有戊寅 邦禮益可見諸公之死終爲感發」
天意之一大助矣碧血之藏荒圮幾年而隨時隱顯幷與國是而定豈不悲且奇哉六臣之後惟朴公遺」
腹孫幸而得免過數世始被錄用七世孫翊賛崇古增築是墓辨其疑信今 上丁卯因 筵臣陳白」
命京畿觀察使治碑立墓道愍節祠有司章甫閔百興沈等託余以紀載之文如諸先生義烈有辭於」
天下後世碑有無何足輕重而 聖主表忠多士勤請屢辭而不能得則遂以託名碑未爲榮謹序其事」而系之銘銘曰」
人紀有五臣節無二 聖祖培植以遺後嗣有若六臣爲 端宗死何用諱例直筆在史露湖之岸纍纍」
其碑不書名傳疑幾世故老曰信此足可攷塋哉久秘衣履終保河則別阡柳無抔土事在倉卒莫詳」
厥故無亦一公混閟此隧四時無薦義士淚惟我 肅考忠節是獎睠墓而感建祠 以享皎日洞照衰」
草始曄追崇 魯陵神人允協於 王之德遐不 廟配君臣一軆忠哉公輩昔者忌諱今則顯誦前所」
荒廢後乃虔奉幷薦芬苾醉琴之裔 王命穹碑舊典是繼道臣治石士林董役秋傳尤記正論不易大」
書貞珉臨江屹立江水滔滔遠通越峽嗚呼六臣墓碑撰成在於 英考丁卯而越十有一年戊寅卽 莊陵復位之周甲也 上命贈朴公」
成公李公柳公河公職吏曹判書兪公職兵曹判書諡朴公曰忠正成公曰忠文李公曰忠簡柳公曰」
忠景河公曰忠烈兪公曰忠穆 乙未
上聞朴公後裔來居京師 命㫌其閭當宁丁酉 命嶺南」
道臣㫌表河公閭盖 肅廟朝以公從子追定其嗣家在安東至是有是 命戊戌遣禮官致祭于愍」
節祠 列聖朝表忠獎義于斯至矣諸公之大名高節昭揭萬世顧何待乎螭趺之有無耶然惟」
我 聖考特命顯刻之盛意迄未奉揚爲士林恨愍節有司李東直與其僚任經紀鑱石朴公嗣孫前縣監基正勤誠相之工乃告訖吁亦可貴也余甞過露梁墓木菀然非復前日之荒壠今豐碑且屹人」
孰不知爲忠臣之葬而益加欽歎者誠由 三朝崇報之盛德而然此宜有太史氏之大書也今因章」
甫之託略叙丁卯後 恩典曁立碑顚未如右云爾

原任右議政完山李徽之謹識

崇禎三壬寅 月 日立


 

조관빈 [趙觀彬, 1691~1757] 
 본관 양주(楊州). 자 국보(國甫). 호 회헌(悔軒). 시호 문간(文簡). 1714년(숙종 4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檢閱) ·수찬(修撰) ·전적(典籍)을 지내고,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이조참의에 기용, 1719년 승지가 되었다. 1723년(경종 3) 신임사화(辛壬士禍)에 화를 당한 아버지에 연좌되어 흥양현(興陽縣)에 귀양갔다가 1725년(영조 1) 풀려나와 제학에 기용, 의금부동지사(義禁府同知事)를 거쳐 1727년 돈령부동지사(敦寧府同知事) 때 노론 4대신을 죄적(罪籍)에서 삭제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1년에는 소론의 영수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하여 결국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와 호조참판 ·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쳐 1753년 대제학에 있을 때 죽책문(竹冊文)의 제진(製進)을 거부하여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좌천, 이어 삼수부(三水府)에 안치되고, 곧 단천(端川)에 이배(移配)되었다가 풀려나와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가 되었다. 문집에 《회헌집(悔軒集)》이 있다.


이휘지 [李徽之, 1715~1785]

 본관 완산(完山) 전주(全州). 자 미경(美卿). 호 노포(老圃). 시호 문헌(文憲). 백강 이경여 선생의 손자, 좌의정 이관명(觀命)의 아들. 1735년(영조 11) 진사에 급제하고 음보(蔭補)로 목사(牧使)를 지냈다. 1766년 정시문과에 급제, 이조참의를 거쳐 청(淸)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대제학이 되었다. 1780년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1782년 중추부판사가 되고 1784년 사은사 겸 동지사(謝恩使兼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집에는 (노포집)이 있다.


 

1755년 강화부유수를 거쳐 1779년(정조 3) 규장각제학이 되었으며,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 이어 곧 우의정으로 승배(陞拜)되었으며, 1781년 실록청총재관을 겸하여 《영조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1784년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청나라에 다녀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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