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참여마당 > 참여게시판
 
 
 
제목  憂國盡忠 (이우당 조태채 선생)
날짜 2011-07-15 11:31:17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1603
첨부파일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나라를 위한 節槪~이우당 조태채 선생

 

 

이우당 조태채 선생 과 저의 선조이신 한포재 이건명 선생, 소재 이이명 선생 그리고 저의 처가 선조이신 몽와 김창집 선생의 충성과 절의를 기리는 아래의 글이 있어 소개드립니다.

 

아래 글의 필자는 이 네분의 충신들의 행적을 명예를 위한 충성으로 묘사하였는데, 제가 보기에는 명예를 넘어 이분들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召命으로 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던 것이고, 그로 인하여 영조대왕 정조대왕 시대의 나라 중흥기가 도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시대의 상황을 깊이 연구하지 아니하고 마치 일본식민지사관의 영향을 받은 듯이 모두가 당쟁으로인한 것으로 몰아가는 자세는 우리들의 앞날에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우리역사의 본받을 점들을 高揚시켜 나아갈 때에 우리들의 앞날이 밝게 열려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네분 충신들의 召命意識은 오늘날 우리들의 직업관, 인생관에도 매우 좋은 선례가 된다고 생각됩니다. 하늘이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시고 기대하시는 소명 또는 목적에 충실한 삶(purpose driven life)을 살아가는 길이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아 래 *************** **************************

 

경종(景宗-조선조 20대 임금)이 병이 들어 차도가 없는데 아직 세자를 책봉하지못하였습니다.

당시 현종(顯宗-18대 임금), 숙종(肅宗- 19대임금), 경종, 세 임금의

핏줄이라고는 오로지 나중에 영조(英祖-21대임금)가 된 연잉군(延仍君)뿐이었습니다.

 

 

조정 재상들 가운데 몽와김창집 선생, 소재 이이명 선생, 한포재 이건명 선생, 이우당 조태채 선생(조태구와 종형제 간)등이 후계자가 없음을 깊이 염려하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자는 발의를 하고 이정린(李廷燐)이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이 네 사람을 바로 노론4대신이라고도 합니다.

 

 

한편 세제 책봉을 반대하던 조태구(조태채와 종형제 간), 최석항, 김일경, 유봉휘등은 연잉군(延仍君)이 슬기롭고 총명함을 꺼려 큰 옥사를 일으켜 노론 4대신과 충신들을 제거하니 이것이 신임사화였습니다.

 

 

이 때 귀양을 가 있던 조태채의 막내아들 조관빈이 울며 조태구에게 아버지를 구해달라고 애걸하자, '자네 아버님이 만약 한 마디만 우리들에게 해준다면 힘써 구해보겠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배신이거나 굴종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조관빈이 아버지에게 그 말을 전하자, 아들을 꾸짖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조태채는 사약을 받게 되었으나 조금도 후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갑진년에 영조(연잉군-延仍君)가 등극한 뒤 이들은 모두 관직이 회복 되었고 나라에서는 四忠書院을 세워 그들의 충성과 절의를 영원히 기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솜처럼 따뜻하고 사람을 해치는 말은 가시처럼 날카로우며 한마디 말의 값어치가 천금과 같고 말로 남을 해치면 칼에 베이는 것처럼 아프다고 했습니다. <명심보감>

 

사람은 생명을 귀중히 여기나, 용기 있는 사람은 생명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깁니다.

 

 

*** 이우당 조태채 선생 ***

 

본관 양주(楊州). 자 유량(幼亮). 호 이우당(二憂堂). 시호 충익(忠翼).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수찬(修撰) ·교리(校理) ·공주목사 ·정언(正言)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호조참판 등을 거쳐 1703년 호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713년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1715년 공조판서가 된 뒤 이조판서를 거쳐 1717년 우의정에 올랐다. 다음해 중추부판사가 되고, 1720년(경종 즉위) 사은사(謝恩使)로 재차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세제(世弟:英祖) 책봉을 건의하여 실현시켜 대리청정하게 했으나 소론의 반대로 철회되자 사직하고, 소론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진도(珍島)에 귀양간 뒤 사사(賜死)되었다. 1725년(영조 1) 복관되었으며, 과천(果川)의 사충서원(四忠書院), 진도(珍島)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이우당집(二憂堂集)》이 있다.

 

 

 

 
번호 작성자 제목 등록일 조회수
107 이주관 백성을 위한 정치 [세종대왕] 2011-07-15 1536
106 이주관 憂國盡忠 (이우당 조태채 선생) 2011-07-15 1604
105 이주관 행복한 삶을 위하여 2011-07-12 1165
104 이주관 하늘의 攝理, 원형이정(元亨利貞) 2011-07-11 1600
103 이주관 死六臣墓碑銘~노포 이휘지 선생 2011-07-04 1617
102 이주관 섬김의 리더쉽(Leadership) 2011-06-25 1372
101 이주관 가정과 나라가 興하려면 2011-06-22 1196
100 이주관 대공지정(大公至正)의 道理 2011-06-11 1434
99 이주관 “學問의 道"에 대하여 2011-06-11 1249
98 이주관 중용(中庸)의 실천을 위하여 2011-06-03 1793
97 이주관 政治의 發展을 위하여 2011-06-02 1353
96 이주관 孝道와 健康한 삶 2011-05-28 1324
95 이주관 하늘을 섬기는 도리 2011-05-21 1480
94 이주관 세종대왕의 생애와 업적에서 2011-05-06 2181
93 이주관 매화를 좋아하는 뜻 2011-04-30 2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