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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충신의 고난과 공헌
날짜 2011-07-22 16:41:56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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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버리며 나라를 지킨 신임사화때의 4충신. 몽와(夢窩) 김창집, 소재(疏齋) 이이명, 한포재(寒圃齋) 이건명, 이우당(二憂堂) 조태채 등은 병약한 경종을 대신할 연잉군(뒤에 영조)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이 있었기에 영조에서 정조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르네상스가 가능했던 것이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학문과 지식은 오히려 해악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더욱더 4충신의 치열한 충절과 언행일치의 삶은 현시대에도 좋은 귀감이 되지 않을까. 충신의 절의가 하남 용마산 자락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러한 선조님들의 충절의 정신은 오늘날에 이르러 아래2, 3의 글에서 새겨 볼 수있듯이 성경(testament)의 관점에서도 고난을 넘어선 실천으로 정의를 향한 공헌과 승리의 길이며,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길인 것이다.

 

*****************       아 래 1  *******************************************************************

서원의 門이 열린다  사충서원
신임사화 ‘4충신’ 숭고한 절의가 용마산 자락에 서려
2011년 03월 10일 (목)                                                  경기일보윤철원 기자  ycw@ekgib.com
  
▲ 하남시 상산곡리에 위치한 사충서원은 4충신을 모시고 있어서인지 다른 서원들에 비해 1칸을 더한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특이한 것은 옆 벽면이 흙이 아닌 벽돌로 쌓여져 있다.

목숨을 버리며 나라를 지킨 신임사화때의 4충신. 몽와(夢窩) 김창집, 소재(疏齋) 이이명, 한포재(寒圃齋) 이건명, 이우당(二憂堂) 조태채 등은 병약한 경종을 대신할 연잉군(뒤에 영조)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이 있었기에 영조에서 정조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르네상스가 가능했던 것이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학문과 지식은 오히려 해악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더욱더 4충신의 치열한 충절과 언행일치의 삶은 현시대에도 좋은 귀감이 되지 않을까. 충신의 절의가 하남 용마산 자락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 영조1년 과천 노량진에 창건

지난 8일 신임사화때 희생된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4충신의 넋을 기리고 있는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찾았다. 도로가 어디에도 안내표지판은 보이지 않았다. 행인에게 물어물어 큰도로에서 빠져나와 굴다리를 지나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빠져나가자 마침내 서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원의 경계를 나타내는 홍살문도 세워져 있지 않을 뿐더러 방형으로 쳐진 담장에 외삼문과 사당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어 다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다. 외삼문 앞에는 공사자재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미리 연락을 취해 놓은 관리인이 나와 문을 열어 주었고 자재들은 강당을 짓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동방대학원大와 연계

충효사상·예절교육 위해

사충예절문화원·강당 건립 추진

앞서 만났던 이상혁 원장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올해 서원의 본격적인 중흥을 위해 강당과 사충예절문화원 건립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이 원장에 따르면 문화원에서는 동방대학원대학교와의 연계를 통해 충효사상 및 예절 교육을 진행할 계획이라는 것.

외삼문을 들어서면 사당이 나타난다. 4충신을 모시고 있어서인지 다른 서원들에 비해 1칸을 더한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특이한 것은 옆 벽면이 흙이 아닌 벽돌로 쌓여져 있다. 사당안에는 4충신의 위패와 영정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사충서원은 본래 1725년(영조 1년) 과천 노량진(지금의 노량진 역)에 설립된 서원이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옹립하려다 희생당한 4충신을 기리기 위해 이들 모두를 신원시키고 서원건립을 명했다. 서원이 과천에 처음 설립된 것은 당시 4충신이 모두 과천에서 왕래했기 때문에 선비들이 과천에 사당을 세우려고 한다는 좌의정 민진원의 건의와 영조 본인도 사육신 서원과 가깝다고 하여 허하였다. 1726년(영조 2년)에 사액서원이 된다.

자신을 옹립하다 희생한

4충신을 기리기 위해

영조 2년 현 노량진에 사액

이후 철폐·복설·소실 ‘수난’

1968년 현 위치로 이전 건립

그러나 그 다음해인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득세하자 다시 4충신은 죄인으로 규정되고 서원도 따라 철폐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후 1740년 경신처분으로 4충신은 다시 복권되었으나 서원은 곧바로 복설되지 못하다가 1756년에야 다시 복설된다.

사충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의 칼날에도 살아남은 서원 중의 하나임에도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 서원 자리가 철도용지로 편입되면서 당시 고양군 한지면 보광동(지금의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전된다. 그러나 이 역시 한국전쟁으로 모수 소실된다. 이후 유림들이 재건하려 했으나 서원 자리에 민가들이 난립해 자리를 잃은 서원은 1968년 현재의 위치인 하남시 상산곡동으로 옮겨오게 된다.

  
▲ 사당내부엔 신임사화때 희생된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4충신의 위패와 영정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 1968년 현 상산곡리로 옮겨

외삼문을 나오면 왼편으로 묘정비가 세워져 있어 서원을 세우게 된 과정과 역사를 알 수 있다. 이 비는 1786년(정조 10년)에 세워진 것으로 세월이 많이 흘러 여러 부분이 마모되고 떨어져 나갔다. 글은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오재순이 지었으며, 글을 직접 쓴 사람은 좌의정을 지낸 홍낙성의 솜씨다.

내용은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의 묘인 원릉을 다녀오는 길에 사충서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어 숙종의 뒤를 이어 경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고 나아가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역적이라는 죄명으로 죽임들 당한 것. 그러나 경종이 왕위에 오른지 4년만에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이들 노론의 4대신은 다시 충신이 됐으며, 영조에 대한 충성을 아끼지 않은 4충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다시 한 번 대내외에 알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비문의 왼쪽면에는 서울의 한강 하류인 노량진에 있던 서원을 철도가 새로 건설되면서 훼손될 우려가 있자 1928년 한강 상류의 보광리로 옮기는 내용으로 민영휘가 추가로 기록해 놨으며, 오른쪽면에는 한국전쟁 이후에 서원건물이 포탄으로 파괴되고 소실돼 1968년 현 위치인 상산곡리로 옮겨 새로 중건한 과정을 김창집의 10대 손인 김순동이 기록해 놓았다.

한편 사충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9월 중정 혹은 하정 주말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

윤철원기자 ycw@ekgib.com


  
“붕당정치를 당쟁으로 인식하는건 식민사관…

국가정체성 정립위한 충·효 교육 반드시 필요”

인터뷰 이상혁 사충서원장

“조선시대의 붕당정치는 정책에 따른 이데올로기 대결이었습니다. 정권만을 잡기 위한 당리당략적 당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의 소산인 거죠.”

지난 3일 서울 공덕동의 한 사무실에서 이상혁 사충서원장(77·변호사)을 만났다. 이 원장은 만나자 마자 여전히 식민사관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국내 사학계에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조선은 왕조국가로서 법통과 대의명분을 가장 중요시 여겼던 사회입니다. 따라서 예와 효에 대한 관념 자체가 국가의 정책적 기반이자 사회를 지탱해 주던 근간이었던 거죠.”

그는 그 유명한 ‘예송논쟁’을 예로 들었다. 예송논쟁은 선왕이었던 효종이 장자가 아닌데, 그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얼핏 보면 쓸데없는 논쟁 같지만 당시 상황과 정치 관계를 고려해보면 상당히 의미있는 논쟁이라는 것이다.

“당시 서인이 내세웠던 것은 천하동례(하늘 아래서는 모두 같은 예법에 따른다)이고 남인이 내세운 것은 왕자례부동사서(왕의 예법은 선비나 서민과 다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왕이라 할지라도 일반법에 따라야 할 것이냐, 아니면 왕권의 특수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냐의 논쟁으로, 왕권을 강화할 것이냐 축소할 것이냐를 둘러싼 고급의 정치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는 거죠.”

이 원장은 또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에 대한 관계와 제계의 무관심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국가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충·효사상에 대한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현시대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강직하고 절의가 있는 인물이 필요한 시대”라고 강조했다.


연잉군 세제 책봉 둘러싸고 귀양간 노론 4대신 등 60여명 처형

■ 병약한 왕과 노·소론의 대립 격화 ‘신임사화’

  
▲ 서원 외삼문 왼편에 세워진 묘정비.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오재순이 지었으며, 서원을 세우게 된 과정과 역사를 알 수 있다.
1720년 숙종이 죽자 세자가 등극한다. 조선조 20대 왕 경종이다. 장희빈의 소생이었던 경종의 결정적인 흠은 생모가 사사되었다는 것과 후사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을 때,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는 말에 세자를 데리고 왔더니 다짜고짜 세자의 생식기를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세자는 항상 시름시름 앓아 후사를 보지 못했다고 전한다.

경종 즉위 초년에는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노론은 정유독대의 일을 거론하며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연잉군(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할 것을 주장한다. 1721년(경종 2년) 결국 경종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한다.

그런데 노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경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돌보지 못하니 연잉군이 대리청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경종에게 정사에서 손을 떼라는 뜻이었다. 소론측은 당연히 왕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거세게 반발했다. 경종은 대리청정을 명하였다가 소론측의 주장으로 다시 거두어들이기를 몇차례 반복한다. 이 때문에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극으로 치닫고 급기야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연잉군 대리청정 사건 빌미

신축-임인년에 잇달아

소론 탄핵으로 170명 유배·축출


임금이 대리청정을 명하면 아무리 임금의 의지가 강하다 하더라도 신하들이 세 번을 간언하는 것이 당시 정치적 관례였다. 이래야 대리청정을 거두더라도 임금의 체면이 사는 것이었다.

처음 대리청정을 명하자 소론측 인사들은 물론이고 성균관 유생들과 지방의 사림들까지 대리청정을 거두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에 노론은 여론이 악화되자 마지못해 대리청정을 거두라는 상소를 올린다. 경종은 처음에는 상소를 물리고 대리청정을 다시 명한다. 이때 노론은 임금의 의지가 확고하니 어명을 따라야 한다며 돌연 입장을 바꾸어 버린다. 노론의 입장 선회에 당황한 것은 경종이었다. 세 번을 간언할 것을 기다렸는데 돌연 노론측이 받아들인 것이 몹시 서운했다. 결국 경종은 대리청정 사건을 빌미로 일대 환국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경종은 사태를 수습하고 왕위를 지키고자 소론 대신 조태구를 불러 사태수습을 지시한다. 당시 우의정이던 조태구는 대리청정은 부당하다며 상소를 올렸고 이 상소를 시작으로 다시 전국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노론은 점차 정치적 명분을 잃어가고 있었다. 소론측은 대리청정을 빌미로 임금을 능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을 탄핵, 귀양 보내는 신축옥사를 일으킨다.

신축옥사로 정권을 잡은 소론은 이에 그치지 않고 남인인 목호룡을 매수하여 노론측 인사들이 경종을 시해하고 반역을 도모한다는 고변을 하게 한다. 이 고변으로 인해 귀양 가있던 노론 4대신을 포함하여 60여명이 처형되고 관련자 170여명이 유배되거나 치죄하여 축출당한다. 이 사건이 임인옥사다.

이 신축옥사와 임인옥사를 묶어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어 일어났다 하여 ‘신임사화’라고 한다.

 

*********************  아   래  2    ******************************************************************

 

고난(苦難)을 넘어서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나니”(욥기 36장 15절)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는 널리 알려진 무신론자이다. 그는 신이 없는 근거의 하나로 “무고한 사람의 고난이 널리 퍼져 있는 세계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하였다.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신이 없는 증거라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욥기는 까뮈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반론이 되는 글이다.

 

 

욥기를 일컬어 고난문학의 최고봉이라 한다. 서양문학사에서 3대 걸작을 꼽으라면 첫째는 단테의 신곡이요 둘째는 괴테의 파우스트요 셋째는 구약성경의 욥기를 손꼽는다. 욥기의 주제는 “의인(義人)이 왜 고난을 당하느냐”이다.

 

 

성경에서 행복할 때 읽는 책이 아가서이고 불행할 때 읽는 책이 욥기이다. 욥기는 극심한 고난과 탄식 중에서 읽고 그 고난의 뜻을 깨달을 수있게 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욥기 36장 15절의 말씀은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를 일러 준다.

 

“사람이 받는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귀를 열어서 교훈을 듣게 합니다”(표준새번역)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고난은 우리를 깨우치고 교훈을 얻게 하는 교육과정이란 것이다. 일컬어 고난학교(苦難學校)라 하겠다.

 

 

 

 

역사학에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부모대가 겪은 고난을 체득(體得)하지 못한 세대는 다시 그 고난을 되풀이 하게 된다.”

 

 

우리들 한국인들에게 한 가지 바람직스럽지 못한 습성이 있다. 고난의 세월을 겪으면서 그 고난을 통한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국민들로부터 배워야 할 바가 있다. 그들도 우리처럼 고난의 역사를 겪어오면서 자신들이 겪은 고난 속에서 그들은 교훈을 얻어 고난의 역사를 영광의 역사로 승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구약성경의 시편 기자는 다음 같이 쓰고 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편 71절)

 

 

그들은 고난의 세월을 겪어오면서 그 고난이 개인에게도 민족에게도 유익하였다는 것이다.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같은 글에서 다음 같은 구절도 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편 119편 67절)

 

 

고난의 세월을 겪기 전에는 세상모른 채로 잘난 줄로 알고 헛된 인생을 살았었는데 고난의 낮과 밤을 거치게 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삶이 올바른 삶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을 거친 것이 오히려 감사하다는 고백이다.

 

 

 

 

**************  아      래    3 *************************************************************************

 

 

 

 

사람답게 사는 길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한 삶을 산다면 그의 삶에 무슨 가치나 보람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며 그 길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 기준의 하나를 창세기 25장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 형제에게서 찾을 수 있다. 두 사람의 삶을 비교하건대 우선 겉보기로는 형인 에서가 사나이답고 인정 있는 삶이었던 것같이 보이고 동생인 야곱은 속임수를 쓰며 살고 꾀로 살아가는 좋지 않았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편을 들지 않으시고 야곱의 편을 들었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성경 본문을 살펴보면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창세기 25장 31절의 말씀으로 미루어 살피건대 에서는 태어날 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하신 현실에 성실치 못하였다. 그는 맏아들, 장자란 명분을 너무나 가벼이 여겨 동생에게 쉽사리 넘겨주고 말았다. 34절에서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겼다”고 지적하고 있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바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태어날 때의 현실을 소중히 여기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마음가짐이다. 동생 야곱은 이런 명분을 지나치리만큼 소중히 여겨 자신이 그 명분을 이어가려고 애셨다.

 

 

우리시대에 사람들이 소홀히 하는 문제들 중의 하나가 명분(名分)이란 가치를 소홀히 하는 점이다. 너무나 모두들 이익이나 이권에 관심을 쏟다보니 명분이나 본질을 소홀히 하며 살고 있다. 형 에서가 팥죽 한 그릇이라는 눈앞의 이익에 팔려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하였다가 삶 전체를 그르친 사연을 우리는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어제 글에 이어 에서와 야곱 형제에 대하여 살펴본다. 형 에서가 겉보기로는 장점이 더 많았던 것 같고 동생 야곱이 단점이 더 두드러진 것 같이 보이면서도 에서의 삶은 실패자로 끝났고 야곱의 삶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왔을까?

 

앞에서 지적한 대로 에서는 명분을 소홀히 여기는 과오를 범하였음에 비하여 야곱은 명분을 따름에 전심을 다하였다.

 

 

둘째로 삶의 목표와 비전을 추구함에 에서와 야곱은 뚜렷하게 달랐다. 에서는 사냥꾼으로써 하루하루를 자신이 좋은 것을 따름에 매여 살았다. 삶에 방향이나 목표를 추구함이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다. 야곱은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 자신을 던졌다. 그의 성격이나 인격에는 일그러진 부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투자하여 따를 가치를 찾았고 보다 나은 잘 살아가는 일에 자신을 던졌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있는 약점과 결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추구한다. 야곱이 추구한 삶이 바로 그런 삶이었다. 그가 불모지 루스 땅을 하나님의 집을 뜻하는 벧엘로 고친 것이나 나루터 얍복을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브니엘로 바꾼 일들이 이를 말하여 준다. 그리고 그의 삶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승화되어 간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사람답게 사는 길을 추구하여 나감에 있어 에서와 야곱 두 형제의 삶을 비교하여 살피고 있다. 그제는 삶의 명분을 찾는 문제, 어제는 삶의 목표와 비전을 찾는 문제를 살폈다. 오늘은 자신의 그늘진 모습을 탈피(脫皮)하여 나가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 나가고자 힘쓰는 도전의식에 대하여 언급코자 한다.

 

“탈피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는 말은 독일의 괴테가 즐겨 쓴 말이다. 산과 들에 나가면 뱀이 벗어 놓은 껍질을 보게 된다. 뱀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껍질을 벗으면서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그런데 뱀이 병이 들게 되면 껍질을 벗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뱀은 자신의 껍질에 갇혀 죽게 된다.

 

 

형 에서도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기는 하나 일상적으로 되풀이 되는 자신의 틀에 갇혀 살았다. 그의 삶은 미래지향적이지를 못하였다. 마냥 현실에 안주하며 살았을 따름이다. 자신을 극복하여 나가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동생 야곱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여 나가는 변화를 추구하였다. 야곱은 현실에 안주하려 들지를 않고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하여 자신을 던졌다. 창세기에서 야곱의 일생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는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위기에 몇 번이나 직면하게 되면서 그때마다 자신을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켜 나갔다.

 

 

끝내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자신을 변혁시켜 나갈 수 있었다. 창세기 35장의 기록에 의하면 야곱이 젊은 날에 청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난지 30년 만에 떠나 온 고향 벧엘로 되돌아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게 하셨다. 야곱은 땅의 사람, 육의 사람을 뜻하는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영의 사람, 하늘의 사람을 일컫는 이름이다. 우리들도 세월 속에서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땅의 사람에서 하늘의 사람으로 자신을 극복 승화 시켜 나가는 도전이 있어야 한다. 그런 도전이 있을 때에 사람답게 사는 길이 열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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