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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해문학 : 소재선생의 혼
날짜 2011-09-23 13:11:07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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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시는 시조시인 감충효님의 시집 "남녁바람 불거든'에 실린 소재 이이명 선생의 혼을 기리는 시이다.

 

 

깊이가 있는 글로 잘 새겨두어 우리들의 인격의 성숙에 도움이 될 수잇고, 앞으로의 보람있는 삶에 좋은 길잡이, 메세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아      래   ****************************************

 

<남해유배문학 인물 탐방④-소재 이이명>

 

 

봉천사(鳳川詞)와 봉천사묘정비(鳳川詞廟庭碑)에 살아 숨 쉬는

이이명(李頤命) 선생의 혼

 

 

습감제(習坎齊) 님의 뜻을 받들어 모셔옴은

연대는 흘러가도 빛과 소금 그대로라

혼미한 안질의 세상 씻어 볼까 합니다.

 

뱁새의 소란함에 대붕(大鵬) 노래 못 들으니

주청(奏請)의 님의 음성 낭랑한 바람소리

봉천사 옛터에 들어 닫힌 귀를 엽니다.

 

버려질 몹쓸 것들 냄새는 더 역겨워

흘러간 매향(梅香) 찾아 당산(堂山)에 올라보니

매부(梅賦)에 서포(西浦) 소재(疎齋)의 매향 피어 오릅니다.

 

 

<詩作 노트>

 

소재(疎齋) 이이명(頤命)은 장인인 서포 김만중이 남해 노도 적소에서 생을 마감한 그해 이 곳으로 유배 되어 와서 매부(梅賦)를 남겼다. 이이명은 관직에 머무르면서 서포 김만중이 그러했듯이 백성을 위해 진언하고 상소하여 백성을 걱정하였다. 숙종12년(1686) 9월 27일에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궁핍할 때 이이명이 임금에게 청하기를 ‘농사가 흉년이 든 점’을 아뢰고 분재(分災)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며, 또 아뢰길, “이렇게 큰 흉년을 당하여 깨우칠 만한 비상 대책을 실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위로 종묘와 백관의 경비라든지 승여(乘輿) 복건의 비용과 기타 긴요치 않은 물목들은 정밀하게 필요한 거산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우선 절감해야 실질적인 혜택이 백성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한 것이 진실로 옳다.” 하였다. 이처럼 백성들의 평온을 위해 정성을 기울인 충신이며 정치가며 학자였다. 이러한 이이명이 1689년 기사 환국에 의해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1692년 숙종 18년 남해로 이배되었다. 2년 간에 걸쳐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인근 향사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의 길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세제 영조의 대리 청정을 주청하여 이를 실현케 하였으나, 소론의 반대 탄핵으로 그 결정이 철회되고 관직을 박탈당하여 남해로 두 번째 유배되었다. 이때도 그를 추앙하는 원근 향사와 사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그 시대의 당쟁은 피도 눈물도 없었고 체면도 도덕성도 없는 잔인무도하고 악랄한 이전투구의 양상이어서, 그 회오리 속에서 참으로 아까운 인물들이 목숨을 잃거나 큰 고초를 당하였는데 소재 이이명 역시 그러한 인물이다.

 

두 번째 남해로 유배를 와서 29년 전에 유배 왔던 집을 수리하여 적거하면서 향사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남해에서 왕으로 추대되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남인 측 목호룡(睦虎龍)의 모함으로 소환되어 그것도 한양으로 가던 중 한강진에서 경종2년(1722)에 사사(賜死)되었다. 후에 그 일이 모함임이 밝혀져 목호룡은 1724년에 장살(杖殺)되어 처단되었지만, 이미 억울하게 비명에 간 아까운 인물을 살릴 수는 없었다. 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 제거에 광분하였던 우리 역사의 어두운 부분이다. 소재 이이명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남해 유학도(儒學徒)와 이웃 진양 향사(晋陽 鄕士)들은 슬퍼하면서 한양 노량진 사충당에 봉안된 영정을 가져와 남해 적소인 습감제(習坎齊, 이이명의 적소)와 멀지 않은 거리에 봉천사(鳳川祠)를 세워 모시고 비문을 지어 묘정비를 입석했다. 봉천사가 대원군의 서원, 향사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고 묘정비가 옮겨진 곳은 남해군 공용 터미널 맞은편의 남해읍 북변동 430번지다. 이이명의 봉천사묘정비(鳳川祠廟庭碑)는 군보호문화재 3호로 등록되어 있는데, 크기로는 높이 260cm, 폭 83cm, 두께 32.5cm의 상당히 큰 규모며, 비문을 지은이는 문장에 뛰어났던 대제학 김조순이다. 한편 이 봉천사묘정비의 비문에 의하면, 봉천사는 남해읍 죽산(竹山:대뫼) 마을 봉천변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천사묘정비도 당연히 봉천사 뜨락에 있었음은 상식적으로 판단된다. 학자들에 의하면 지금 봉천사묘정비의 동쪽 300미터쯤 되는 곳에 봉천사의 터로 추정되는 허지를 발견하였기에, 이곳에 봉천사를 복원하고 봉천사묘정비도 옮겨와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아직 실현되지는 않고 있다. 동해시에서 약천 남구만이 머물렀던 동해시 망상동 심곡에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시비를 세우고 약천사를 다듬어 테마 마을을 조성해 각광을 받고 있음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봉천사묘정비의 사실(史實)에 입각한 귀중한 역사 자료가 이렇게 탄탄한데, 이 고장의 진정한 보물로서의 그 무한한 잠재성이 큰 빛을 못 보고 있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서포 김만중은 소재 이이명의 장인이다. 서포 김만중이 남해 노도의 적소에서 유명을 달리한 그 해, 사위인 소재 이이명이 남해에 유배되어와 노도 적소에 가보니 장인이 심은 매화나무 두 그루가 주인을 잃고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을 자신의 적소에 옮겨와 심고 매부(梅賦)를 지어 칭송하였다. 매부의 원문과 해석문을 소개하려했지만 지면 관계도 있고 이미 발행된 남해읍지(南海邑誌)에 소개되어있으며, 남해읍 유배 거리에 조형물로 소개되어 있기에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소재 이이명은 남해에 두 번씩이나 유배되어온 인물로서 이 곳 사람들과는 크나큰 인연을 맺고 호흡을 같이하면서 많은 추앙을 받던 인물이다. 수십 년 전만 하여도 봉천이 흐르는 동네 죽산(竹山:대뫼) 마을 뒷동산인 당산(堂山)에 매원(梅園)이 있어 청매, 홍매가 어우러진 꽤 많은 매화나무가 그 위용을 자랑하며 죽산 마을 주변과 하마장(下馬場)들판, 봉천과 강진 바다에 매향(梅香)을 흘러 보내주었으나 남해대학이 들어서면서 기숙사 부지가 되어버렸다. 언제부터 그 매원(梅園)이 조성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가 없지만, 소재 이이명 선생의 가르침을 많이 받은 이 고장 사람들이 소재 이이명이 심어 아끼며 가꾸었던 그 매화 두 그루의 의미를 기리기 위한 운동으로 은연중 적소 주변에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 까지나 가정이지만, 유독 적소 주변에 큰 매원이 생겨나고 오래된 매화 등걸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그러한 유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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