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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매부(梅賦)연유문~소재 이이명 선생
날짜 2011-09-27 11:10:32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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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부(梅賦) 연유문 ~ 소재(疎齋) 이이명(李頤命)선생

 

***  배경설명   ***

 

  소재(疎齋) 이이명(李頤命)선생은 장인인 서포 김만중 선생이 남해 노도 적소에서 생을 마감한 그해 이 곳으로 유배 되어 와서 매부(梅賦)를 남겼다.

 

소재 선생은 관직에 머무르면서 서포 선생이 그러했듯이 백성을 위해 진언하고 상소하여 백성을 걱정하였다. 숙종12년(1686) 9월 27일에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궁핍할 때 이이명이 임금에게 청하기를 ‘농사가 흉년이 든 점’을 아뢰고 분재(分災)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며, 또 아뢰길, “이렇게 큰 흉년을 당하여 깨우칠 만한 비상 대책을 실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위로 종묘와 백관의 경비라든지 승여(乘輿) 복건의 비용과 기타 긴요치 않은 물목들은 정밀하게 필요한 거산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우선 절감해야 실질적인 혜택이 백성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한 것이 진실로 옳다.” 하였다. 이처럼 백성들의 평온을 위해 정성을 기울인 충신이며 정치가며 학자였다.

 

이러한 소재 선생이 1689년 기사환국에 의해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1692년  숙종 18년 남해로 이배되었다. 2년 간에 걸쳐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인근 향사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의 길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세제 영조의 대리 청정을 주청하여 이를 실현케 하였으나, 소론의 반대 탄핵으로 그 결정이 철회되고 관직을 박탈당하여 남해로 두 번째 유배되었다. 이때도 그를 추앙하는 원근 향사와 사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

 

 두 번째 남해로 유배를 와서 29년 전에 유배 왔던 집을 수리하여 적거하면서 향사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남해에서 왕으로 추대되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론 측 목호룡(睦虎龍)의 모함으로 소환되어 그것도 한양으로 가던 중 한강진에서 경종2년(1722)에 사사(賜死)되었다. 후에 그 일이 모함임이 밝혀져 목호룡은 1724년에 장살(杖殺)되어 처단되었지만, 이미 억울하게 비명에 간 아까운 인물을 살릴 수는 없었다. 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 제거에 광분하였던 우리 역사의 어두운 부분이다. 소재 선생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남해 유학도(儒學徒)와 이웃 진양 향사(晋陽 鄕士)들은 슬퍼하면서 한양 노량진 사충당에 봉안된 영정을 가져와 남해 적소인 습감제(習坎齊, 이이명 선생의 적소)와 멀지 않은 거리에 봉천사(鳳川祠)를 세워 모시고 비문을 지어 묘정비를 입석했다. 봉천사가 대원군의 서원, 향사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고 묘정비가 옮겨진 곳은 남해군 공용 터미널 맞은편의 남해읍 북변동 430번지다. 소재 이이명 선생의 봉천사묘정비(鳳川祠廟庭碑)는 군보호문화재 3호로 등록되어 있는데, 크기로는 높이 260cm, 폭 83cm, 두께 32.5cm의 상당히 큰 규모며, 비문을 지은이는 문장에 뛰어났던 대제학 김조순이다. 한편 이 봉천사묘정비의 비문에 의하면, 봉천사는 남해읍 죽산(竹山:대뫼) 마을 봉천변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천사묘정비도 당연히 봉천사 뜨락에 있었음은 상식적으로 판단된다. 학자들에 의하면 지금 봉천사묘정비의 동쪽 300미터쯤 되는 곳에 봉천사의 터로 추정되는 허지를 발견하였기에, 이곳에 봉천사를 복원하고 봉천사묘정비도 옮겨와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아직 실현되지는 않고 있다. 봉천사묘정비의 사실(史實)에 입각한 귀중한 역사 자료가 이렇게 탄탄한데, 이 고장의 진정한 보물로서의 그 무한한 잠재성이 큰 빛을 못 보고 있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서포 김만중 선생은 소재 이이명 선생의 장인이다. 서포 선생이 남해 노도의 적소에서 유명을 달리한 그 해, 사위인 소재 선생이 남해에 유배되어와 노도 적소에 가보니 장인이 심은 매화나무 두 그루가 주인을 잃고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을 자신의 적소에 옮겨와 심고 매부(梅賦)를 지어 칭송하였다. 매부의 원문과 해석문을 아래에 소개한다.

 

소재 이이명 선생은 남해에 두 번씩이나 유배되어온 인물로서 이 곳 사람들과는 크나큰 인연을 맺고 호흡을 같이하면서 많은 추앙을 받던 인물이다. 수십 년 전만 하여도 봉천이 흐르는 동네 죽산(竹山:대뫼) 마을 뒷동산인 당산(堂山)에 매원(梅園)이 있어 청매, 홍매가 어우러진 꽤 많은 매화나무가 그 위용을 자랑하며 죽산 마을 주변과 하마장(下馬場)들판, 봉천과 강진 바다에 매향(梅香)을 흘러 보내주었으나 남해대학이 들어서면서 기숙사 부지가 되어버렸다. 언제부터 그 매원(梅園)이 조성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가 없지만, 소재 선생의 가르침을 많이 받은 이 고장 사람들이 소재 선생이 심어 아끼며 가꾸었던 그 매화 두 그루의 의미를 기리기 위한 운동으로 은연중 적소 주변에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 까지나 가정이지만, 유독 적소 주변에 큰 매원이 생겨나고 오래된 매화 등걸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그러한 유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시조시인 감충효 님의 설명을 일부 수정함)


 매부(梅賦) 연유문

 

凡物之有生氣者(무릇 사물에는 생기라는 것이 있고)

皆似有性情知覺(성품과 정서 지각이 있음도 모두 같구나.)

若孝子哭而墓栢死(효자가 부모 그리워 곡을 하면 무덤의 잣나무가 죽고)

兄弟分以庭荊枯者是巳(형제가 서로 나누어져 맞은 곤장으로 수척해지니)

感應之理不可誣也(감응의 이치는 업신여길 수가 없구나)

西浦公謫舍嘗種二梅樹(서포공의 적사에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있어)

每歲開花結子(매년 꽃피고 열매를 맺는다.)

余自東邊移入島中(내 동쪽 변에서 옮겨와서 섬 가운데로 들어오니)

族櫬已北貴(서포 공의 널은 이미 북으로 돌아갔네.)

而二梅獨立荒庭(두 그루 매화나무는 거친 뜰에 외롭게 서서)

憔悴欲死(초췌하게 죽어가고 있구나.)

余撫遺躅而憐之(내 공의 남은 흔적을 어루만지며 가엽게 생각하여)

移植於所居堂前謁然復蘇(적소에 옮겨 심으니 장인을 만난 것으로 여겨 다시 소생하고)

枝葉已向茂矣卉植百品 (가지와 잎이 무성하였고 많은 풀도 자랐다.)

惟梅獨稟其幽貞皎潔之性(오직 매화는 맑고 밝고 곧은 성품이라)

公之好之也正以其氣味之相近(공이 좋아하는 것은 기미가 서로 가까웠기 때문이고 )

而梅之不二公於存沒之際者(살고 있을 때나 죽은 뒤나 한결같이 대한 것은)

眞若士之爲知己(진정 선비가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하고)

女之爲所天(여인이 남편을 위하듯)

其意有足悲者(그 뜻이 슬퍼할 만한 것이 있어)

作賦以頌之(부를 지어 기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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