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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봉천사묘정비(鳳川祠廟庭碑)
날짜 2011-11-07 16:33:27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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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사묘정비(鳳川祠廟庭碑)

 

아래는 “남해안역사문화연구소”에 기록된 소재 이이명 선생의 행적과 그를 기린 “봉천사 묘정비”의 설립내역과 그 번역문이다.

 

소재공께서 스스로의 생명과 멸문지화의 위험을 무릅쓰고서, 가장 보배로운 의(義)를 취하시고 살신성인(殺身成人)의 참된 인(仁)을 이루시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소재공의 조부이신 백강공께서 자주 말씀하신 “하늘을 섬기는 도리”에 충실하신 것이니, 돌아가신 이후에라도 事必歸正, 하늘의 섭리(攝理)로 모든 것이 역사앞에 밝혀지게 되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어찌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아 래 **********************************************************

 

이이명(李頤命)

왕조

본관

생몰연도

유배기간

유배시관직

최종관직

유배사유

숙종

이이명

전주

1658~1722

1689~1694

승지

좌의정

기사환국

 

이이명은 효종 9년(1658)에 출생하여 경종 2년(1722)에 사사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며, 본관은 완산 또는 전주(全州)이다. 자는 지인(智仁) 또는 양숙(養叔)이며, 호는 소재(疎齋)이다.

세종의 아들 밀성군(密城君)의 6대손으로, 영의정 경여(敬輿)의 손자이자 대사헌 민적(敏迪)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의주부윤 황일호(黃一皓)의 딸이다. 작은아버지 지평 민채(敏采)의 양자로 들어갔다.숙종 6년(1680).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부터 벼슬살이를 시작하였으며1686년 사헌부의 집의로 있으면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1월 강원도관찰사에 특제(特除)되기까지, 홍문관의 박사·수찬·교리·응교, 사헌부지평, 사간원헌납, 이조좌랑, 의정부사인 등을 역임하면서 송시열(宋時烈)·김석주(金錫胄) 등의 지원 아래 이선(李選)·이수언(李秀言) 등과 함께 노론의 기수로 활약하였다.그리하여 강원도관찰사로 나간 지 8개월 만에 승정원의 승지가 되어 조정에 돌아오는 남다른 승진을 거듭하였으나, 1689년 기사환국을 당하여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뒤이어 남해로 이배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유배생활 5년 만에 이른바 갑술옥사가 일어나 호조참의로 조정에 돌아온 뒤, 승지를 거쳐 숙종 22년(1696)에 평안도관찰사로 탁임(擢任)되었지만, 늙은 어머니의 병을 칭탁하여 극구 사절하고 강화부유수로 나갔다.그러다가 2년 만에 대사간이 되어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형 사명(師命)의 죄를 변호하다가 다시 공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듬해 2월 유배가 풀리기는 하였으나, 2년 동안 기용되지 못하고 있다가, 1701년 예조판서로 특임되었고, 이어 대사헌·한성부판윤·이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1706년 우의정에 올랐다.그리고 1708년 숙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으면서 좌의정에 올라 세제(世弟: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다 실패하여 다시 남해로 유배되기까지, 15년 동안을 노론정권의 핵심적 존재로 활약하였다.

이 동안 숙종의 죽음으로 고부사(告訃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갔을 때, 독일신부 쾨글러(Koegler, I.)와 포르투갈신부 사우레즈(Saurez, J.) 등을 만나 교유하면서 천주교와 천문, 역산에 관한 서적을 얻어가지고 돌아와 이를 소개하였던 것으로 전한다.(천주교 역사에 의하면 이것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예수교를 소개한 것으로 되어있다.)

경종 1년(1721)에 세제의 대리청정이 실현되려다가 실패하자, 이를 주모한 김창집(金昌集) 등과 함께 관작을 삭탈당하고 남해에 유배되어 있던 중,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이듬해 4월 서울로 압송, 사사(賜死)되었다.공주에 우선 안장되었다가, 영조 1년(1725)에 복작되면서 임천 옥곡(玉谷)에 이장되었고, 영조의 지시로 한강가에 사우(祀宇)가 건립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을 엮은 ‘소재집’ 20권 10책이 전하고, 또 양역변통사의(良役變通私議)와 강역관계도설(疆域關係圖說), 강도삼충전(江都三忠傳) 등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이이명은 관직에 머무르면서 서포 김만중이 그러 했듯이 백성을 위해 진언하고 상소하여 백성을 걱정하였다.

숙종 12년(1686) 9월 27일에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궁핍할 때 응교 이이명이 임금에게 청하기를 “ 농사가 흉년이 든 점을 아뢰고 분재(分災)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며” 또 아뢰길 “이렇게 큰 흉년을 당하여 깨우칠 만한 비상 대책을 실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위로 종묘와 백관의 경비라든지 승여(乘輿)와 복건(服饉)의 비용과 기타 긴요치 않은 물목들은 정밀하게 필요한 거산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우선 절감해야 실질적인 혜택이 백성에게 돌아갈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진실로 옳다”하였다. 이처럼 백성들의 평온을 위해 정성을 기울였다.

 

남해로 유배 와서 까지 백성들의 깨우침을 주기위해 글을 가르칠 정도였으니 이이명의 인품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남해군 공용터미널 맞은편, 남해읍 북변동 430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이이명의『봉천사 묘정비(鳳川祠廟庭碑)』는 군보호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크기로는 높이 260cm, 폭 83cm, 두께 32.5cm로서 정사각형 철재 보호담(440cm×440cm)으로 보호를 하고 있다.

 

원래 비가 봉천사 묘정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사당은 없어졌고 비만 현 위치에 있다.

소재 이이명이 사사된지 106년 후에 문장에 능했고 대제학인 김조순이 지은 비문이 간략하면서 이이명에 대하여 사실을 잘 표현하였기에 비문 내용 전체를 소개코자 한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 비문을 번역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보국숭록대부영돈령부사겸이조판서지경연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춘추관사규장각검교제학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영안부원군 김조순이 짓고,

가선대부행홍문관부제학지제교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김난순이 쓰고,

자헌대부의정부좌찬찬겸경연의금부춘추관사동성균관오위도총관 조정철이 새기었다.

 

남해현은 바다 섬 가운데 있다. 현의 동쪽에 죽산리(竹山里)가 있고 그 아래쪽에 냇물이 흐르고 있으니 이른바 봉천이다. 냇물 위쪽에 사당이 있으니 이를 봉천사라 한다.

죄의정 충문공 호가 소재(疏齋)인 이선생의 영정을 받들어 모시고 있는 곳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 곳 선비들은 이 어른 소재공의 사당을 모시게 된 것일까?

공은 백강 이경여 선생의 후손이라 선덕에 근원하여 어릴 때부터 재기(才氣)가 탁월하여 성장함에 따라 점점 옛 서인들의 유훈(遺訓)을 계승하고 도의(道義)나 문장(文章)으로 당세(當世)에 뛰어나 군자로 추앙되었다.

23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29세에는 중시(관직에 있는 관료에게 다시 보는 시험)를 거쳐 30세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39세에 가선대부, 44세에 정승이 되었다. 경종 신축년(辛丑年. 1721)에 수상(영의정) 김창집(金忠獻. 昌集)과 충익공 조태채(忠翼公 趙泰采)와 종제(從弟) 충민공 이건명(忠愍公 李健命)과 함께 어전에서 연잉군(延礽君. 후일 英祖)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다가 남해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듬해 체포되어 한강나루에 이르러 후명(後命. 귀양살이 죄인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함)을 받아 돌아가신 뒤 3년만에 복관되면서 시호를 받고 노량진의 사충신(四忠臣) 사당에 봉안되었다. 공을 세상에서 칭하기를 건저 4대신 중 한 분이라 하신다.

공이 뜻을 세움에 있어 도를 호위하고 간사함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자기 임무를 다 하였다. 임금을 모실 때에는 지혜를 다하고 충성을 다함이 충신의 길이요 군자는 화친과 믿음을 위주로 사람들을 대하매, 소인배들은 이러한 사람을 꺼리고 질투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알아주는 현군(賢君)을 모시고 삼사(三事)를 위해 자기 할 일을 다했다.

그러나 정유년(丁酉年) 이후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는데 기사환국(己巳換局)에 말려들어 영해(寧海)로 5년동안 귀양갔다가 남해로 이배(移配)되었다. 남해에서 일소재(一小齋)를 지어 전한(前漢)의 매의(買誼)가 장사(長沙)에 귀양가서 지은 복조부어(鵩鳥賦語)를 취하여 지감(止坎)이라 이름지었다. 다시 건저(建儲)의 화가 일어나서 재차 남해로 유배되어 오자 공은 낡은 옛집을 수리하여 이름을 고쳐 습감(習坎)이라 불렀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공은 화를 입고 말았다.

공이 전후 4~5년간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를 그 섬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선비들은 공이 살아계실 적에는 떳떳이 스승으로 모셨고 공이 죽음을 당하자 마치 친부(親父)를 잃은 듯이 슬퍼들 하였다. 백년을 두고 공이 끼친 덕택(德澤)은 더욱 오래 가며, 공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두텁고 변함이 없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공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추념(享祀追念)한 까닭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정조조 경신년에 이 곳 선비들은 진양군 선비들과 합심 노력하여 공의 사당을 새로 지으니 습감제(習坎齋)의 옛터에서 멀지 않은 거리였다. 한편 불원천리(不遠千里) 서울로 달려가서 노량진 사당의 영정을 본떠 모시고 돌아와서 조순에게 부탁한 비문도 마련되어 입석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곳 선비들은 군자의 지성을 다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컨대 천지가 사람을 낳을 때는 그 성품이 충직(忠直)한 것이었으나 그러나 이익만 추구하는 자는 그 천성이 교란(攪亂)되어 소인이 되고 마는 것이니 도를 위해 순사(殉死)하는 자 이 충성스런 군자의 마음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신임사화를 당하여 조정이 불안할 때 군왕께서 질환에 계셔서 보위계승(寶位繼承)에 관한 문제를 둘러싸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위태로움이 구슬을 쌓아 둔 것과 같음에 따라 흉당(凶黨)들은 거꾸로 법통을 무시하고 법통 아닌 사람을 왕으로 내세우려 하였다.

어찌 처음에는 인심이 없었으리오 마는 그러나 흉도들은 그 권세를 앞세워 흉계가 극에 달했다. 마침내는 충량(忠良)들을 말살하려 했으며, 심지어는 오륜(五倫) 오상(五常)까지도 묵살하려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자기 파당(派黨)의 일시적 이익만을 위함이니 아, 슬픈 일이다.

공은 다른 3대신과 함께 이 몸이 죽는다 한들 원통할 것이 없고 가문이 망한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다 하여 오직 종묘사직에 대한 근심과 저사(儲嗣)의 호위를 위한 일 외는 일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소위 사직을 편안케하는 것만이 그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옛적에는 국가를 편안케 하는 자는 왕왕 몸도 편안하고 가정의 부(富)도 누리면서 아무런 재액(災厄)없이 무사히 지낸 일도 있었고 반드시 오형(五刑)을 받고 칠족(七族)이 멸망될 금신이 없으나 뒤에 능히 구오형(具五刑) 담칠족(湛七族)을 분별하였으니 어찌 공의 기뻐하는 마음이 미워함 보다 심함이 있겠는가.

일신이 죽고 가문이 망할지라도 신념을 굽혀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을 남길 분이 아니다. 지난날 흉도들의 계교(計巧)대로라면 동궁(東宮)의 자리가 보존되기 어려웠고 왕세제의 자리가 보위되지 못하였으면 많은 사람의 원통함도 밝히지 못하였을 것이다.

공도 이를 명백하게 밝히지 못할 줄 알았으나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공은 의리변별(義理辨別)이 바르고 밝은 까닭이다. 그러나 왕세제가 보위에 오르자 마침내 흉당은 패하고 백성의 원통함은 다 밝혀지고 국시(國是)가 정해지니 어찌 다른 3대신과 더불어 공이 지켜 온 충성스런 공덕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국가 영장(靈長)의 복은 하늘과 더불어 가이 없으니 선인(善人)에게는 복을 음탕한 사람에게는 화를 주는 법이니 참으로 하늘을 믿는지라 속이지 못하였다.

옛날 맹자께서는 제일 맛있는 웅장(熊掌)보다는 제일 보배로운 의(義)를 취할 것이다. 라고 하였고. 공자께서는 살신성인(殺身成人)이 참된 인(仁)이라 하였거늘 공은 군자로서 의도 취하고 인도 이루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으리오. 옛날 구래공(寇萊公)은 소인배의 배척을 받아 뢰(雷)나라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제사를 모신다.

이 섬에서 공의 제사를 모심은 또 한사람의 구공을 섬기듯 마땅한 일이다. 공이 시운을 만난 바가 또한 구공과 같은 바 건저4대신 모두가 귀양가고 사약을 받은 것은 경종께서 병중에 계시어 조사를 충분히 못한 탓이다.

하루는 대신들을 거느리고 어전회의(御前會議)를 하는 자리에서 홀연히 좌우에 물으시었다. “항상 보면 백발상신(白髮相臣)이 경연자리에 나오더니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제공(諸公)들 보다 머리도 허옇게 세었지” 흉도들은 다 목을 움츠리고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며 대답도 못하였다. 이는 송나라 진종(眞宗)이 “내 오래도록 구준(寇準)을 못 보았다”라는 말과 서로 닮았도다.

흉도들은 비록 자기들이 죽더라도 성스러운 시호까지 가질 야심으로 꾸며 놓고 있었으나 어찌 흉도들에게 이 거짓 광영이 무슨 소용이랴.

천년 후에도 자기 분수를 헤아리지 못한 이 많은 무리들을 두고 봐야하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숭정기원(崇禎紀元)4(四)무자(戊子)오월(五月) 일(日) 립(立)』

 

소재 이이명은 숙종 15년(1689)에 강원감사(강원도관찰사)로 재직하다가 기사사화로 남해에 유배를 왔고 경종 원년(1721)에 영중추부사로 재직하다가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자’로 낙인이 찍혀 2번째도 이곳으로 유배를 와서 남해와는 인연이 깊다.

남해에서 향사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의 학문을 가르치다가 역모죄로 모함을 받아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한강 노량진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였다.

남해 향사들은 어버이를 잃은 것과 같이 슬퍼하였다고 하니 소재 이이명이 남해로 유배 와서 오로지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칠 뿐 아니라 향사들과 교유관계 또한 두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헌 :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淸選考, 萬姓大同譜, 藥坂漫錄, 朝鮮後期黨爭史硏究(李銀順, 一潮閣,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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