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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朝鮮時代의 民主思想
날짜 2012-03-15 15:15:44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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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나라와 선진 대부분의 나라에 정착한 정치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서구에서 예수교의 생명 중시의 사상 및 천부인권(인권은 하나님이 부여한 것으로 가장 중시함)의 사상으로부터 태동하여, 영국을 필두로 미국 프랑스 독일 등으로 전파되며 우리에게까지 전파되어 정착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서구문명이 도래하기 이전에 이미 이러한 민주주의 정치사상이 있어 왔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직접민주주의의 핵심인 국민 투표를 실시하였고, 백강 이경여 선생은 예수교의 기본정신과 같이 하늘을 섬기고 백성을 사랑해야함을 정치의 으뜸으로 삼았으며, 서하 이민서 선생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임을 역설하였습니다.

 

백강 이경여 선생이 조정에서 자주 말씀한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사실상 예수교의 하나님을 섬기는 정신과 큰 틀에서 같은 맥락의 의미로 해석됩니다. 다만 1600년대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예수교의 성경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던 것인데, 이미 성경의 기본적 정치사회사상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관련된 글들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서구의 민주주의도 그 문제점을 노정(露呈)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건실한 기본정신을 잃어버리고 탐욕으로 흐르는 현대의 인간들의 타락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앞으로 우리 후학들이 우리 선조님들의 이러한 훌륭한 민주주의 정치사상들과 그 배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아가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 인류의 삶의 개선을 위해서 크게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계의 정치사회문화를 선도(先導)하는 나라가 되어가기를 바랍니다.

 

 

1. 세종시대 공법(貢法)제정과 국민투표

 

어느 시대이건 세금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였고, 580여년 전 세종 시대에도 과세 기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조선시대는 토지에 세금을 부여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큰 재원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이라 하여, 풍흉을 직접 조사하여 세금을 매기는 방식을 취했으나, 토지를 조사하는 위관(委官)들의 성향에 따라 세금이 좌우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이에 세종은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법을 마련하였다. 공법이란 국가가 수취하는 토지세의 한 제도로서, 수년간의 수확고를 통산하여 평년의 수익을 정해진 비율로 삼아 세금을 매기는 제도였다.

 

1427년(세종 9) 세종은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서 문과(文科) 책문(策問)의 제(題)를 공법(貢法)으로 했다. 공법 시행에 앞서 재능 있는 선비들의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였다.

 

인정전에 나아가 문과 책문의 제(題)를 내었다. 왕은 이렇듯 말하노라.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정치를 함에는 반드시 일대(一代)의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니, 방책(方冊)에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전제(田制)의 법은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가. 하후씨(夏后氏)는 공법으로 하고, 은인(殷人)은 조법(助法)으로 하고, 주인(周人)은 철법(徹法)으로 한 것이 겨우 전기(傳記)에 나타나 있는데, 삼대의 법을 오늘날에도 시행할 수 있겠는가. …… 명나라에서 문득 옛 제도를 따라 하후씨(夏后氏)의 공법을 채택하였다 해서, 어찌 그것이 행하기가 편리하고 쉽다고만 할 것인가.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는 집으로써 나라를 만들고 먼저 토지 제도를 바로잡으셨고, 태종 공정대왕께서도 선왕의 뜻을 따라 소민(小民)을 보호하셨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으로 큰 기업(基業)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우러러 조종(祖宗)의 훈계를 생각하여 융평(隆平)의 다스림에 이르기를 기대했으나, 그 방법을 얻지 못하였다. 돌아보건대 어떻게 닦아야만 이룰 수 있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다스림을 이루는 요체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하니, 백성을 사랑하는 시초란 오직 백성에게 취하는 제도가 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전제(田制)와 공부(貢賦)만큼 중한 것이 없는데, 토지 제도는 해마다 조신(朝臣)을 뽑아서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손실을 실지로 조사하여 적중(適中)을 얻기를 기하였다. 간혹 사자로 간 사람이 나의 뜻에 부합되지 않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救恤)하지 아니하여, 나는 매우 이를 못 마땅하게 여겼다. …… 조법(助法)은 반드시 정전(井田)을 행한 후에야 시행되므로, 역대의 중국에서도 오히려 또한 시행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산천이 험준하고 고원(高原)과 습지가 꼬불꼬불하여 시행되지 못할 것이 명백하였다. 공법은 하나라의 책에 기재되어 있고, 비록 주나라에서도 또한 조법이 있어서 향(鄕)과 수(遂)에는 공법을 사용하였다고 하나, 다만 그것이 여러 해의 중간을 비교하여 일정한 것을 삼음으로써 좋지 못하였다고 이르는데, 공법을 사용하면서 이른바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 맹자는 말하기를,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經界:田制)로부터 시작된다.’라고 하였으며, 유자(有子)는 말하기를, ‘백성이 유족(裕足)하면, 임금이 어찌 부족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비록 덕이 적은 사람이나 이에 간절히 뜻이 있다. 그대들은 경술에 통달하고 정치의 대체를 알아 평일에 이를 강론하여 익혔을 것이니, 모두 진술하여 숨김이 없게 하라. 내가 장차 채택하여 시행하겠노라.”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9년 3월 16일)

 

[御仁政殿, 出文科策問題。王若曰: “自古帝王之爲治, 必立一代之制度, 稽諸方策, 可見矣。 制田之法, 昉於何時? 夏后氏以貢、殷人以助、周人以徹, 僅見於傳記。 三代之法, 可行於今日歟? …… 皇明動遵古制, 而取夏后之貢, 豈其行之便易歟?” 惟我太祖康獻大王, 化家爲國, 首正田制, 太宗恭定大王, 遹追先志, 懷保小民。 肆予寡昧, 嗣承丕基, 仰惟祖宗之訓, 期至隆平之治, 未得其道, 顧何修而致歟? 嘗聞致治之要, 莫先於愛民, 愛民之始, 惟取民有制耳。 今之取於民, 莫田制貢賦之爲重。 若田制則歲揀朝臣, 分遣諸道, 踏驗損實, 期於得中, 間有奉使者, 不稱予意, 不恤民隱, 予甚非之。…… 助法, 必井田而後行。 歷代中國, 尙且不能, 況我國山川峻險, 原隰回互, 其不可也明矣。 貢法載於《夏書》, 雖周亦助, 而鄕遂用貢, 但以其較數歲之中, 以爲常, 謂之不善, 用貢法而去。 所謂不善, 其道何由? …… 孟子曰: “仁政必自經界始。” 有子曰: “百姓足, 君孰與不足!” 予雖涼德, 竊有志於斯焉。 子大夫通經術、識治體, 講之於平日熟矣, 其悉陳無隱, 予將採擇而施用焉]

 

세종은 공법 결정 이전에 과거 시험에 공법 관련 내용을 출제함으로써, 공법 제정 문제가 조정의 현안임을 강조하는 한편, 공법 시행 이전에 분위기를 미리 조성하고자 하였다. 공법 결정 이전에 세종은 신하와 유생들의 의견을 알아본 후에, 최종적으로 공법의 시행은 백성이 결정할 사안으로 판단하였다.

 

1430년(세종 12) 세종은 ‘공법’이라는 새로운 세법 시안을 갖고 백성들에게 그 찬반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무려 5개월간 실시하였다. 치밀한 성품과 백성들을 최우선으로 하는 세종의 의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 『세종실록』에는 “정부ㆍ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ㆍ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세종실록』, 세종 12년 3월 5일)”는 기록이 보인다.

 

호조 판서 안순(安純)이 아뢰기를, “일찍이 공법의 편의 여부를 가지고 경상도의 수령과 백성들에게 물어본즉, 좋다는 자가 많고, 좋지 않다는 자가 적었사오며, 함길·평안·황해·강원 등 각도에서는 모두들 불가하다고 한 바 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직접 찾아 조사할 때에 각기 제 주장을 고집하여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편리하게 하고 빈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가 심히 우려하고 있다. 각도의 보고가 모두 도착해 오거든 그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사해서 폐해를 구제하는 등의 일들을 관리들로 하여금 깊이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12년(1430년) 7월 5일)

 

[視事。 戶曹判書安純啓: “曾以貢法便否, 訪于慶尙道守令人民, 可多否少, 咸吉、平安、黃海、江原等道, 皆曰: ‘不可。’” 上曰: “民若不可, 則未可行之。 然損實踏驗之際, 各執所見, 頗多失中。 且姦吏用謀, 富者便之, 貧者苦之, 予甚慮焉。 各道所報皆到, 則貢法便否及踏驗救弊等事, 令百官熟議以啓。”]

 

위의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세종이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民若不可)’고 천명한 점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백성이 찬성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다는 세종의 선언은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1430년 8월 10일 호조에서는 공법 실시를 둘러싼 국민투표의 결과를 보고하였다. 17만 여명의 백성들이 투표에 참여하여, 9만 8,657명이 찬성, 7만 4,148명이 반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찬반 상황을 지역별로 『세종실록』에 기록할 정도로 국가의 역량이 집중된 사업이었다. 당시 인구수를 고려하면 17만 여명의 참여는 노비나 여성을 제외한 거의 전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요즈음처럼 인터넷이나 전화로 여론조사가 불가했던 그 시절에 수많은 백성들을 대상으로 일일이 투표에 참석하도록 한 점은 매우 눈길을 끈다. 관리들이 집집마다 백성을 찾아가며 의견을 물었을 가능성이 큰데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이는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큰 사업이었다. ‘민본’과 ‘민주적 절차’, ‘백성과의 소통’을 중시했던 세종의 의지는 580년 전의 국민투표를 가능하게 하였고, 그 성과물인 공법은 세종 시대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글쓴이 :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고전번역원 2013 .3.12.]

 

 

2.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 ~ 백강 이경여 선생

 

1631년(인조 신미년) 부제학이 된 이경여(당시 나이 47세)가 상차하여 인조임금의 잘못을 지적한 글이다. 이중에는 아래와 같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할 것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는데, 인조임금은 매우 절직한 말이라 여겨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다.

 

10월 부제학 이경여가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보건대, 근래 대각(臺閣)의 신하가 상의 결점과 시정의 잘잘못을 가지고 전후에 걸쳐 진달해 아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채택하여 받아들인 효과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한 상황에서 거의 미안스런 전교만 내리시어 멀리서부터 오는 사람까지도 막는 결과를 빚고 말았습니다. 신들처럼 눈먼 사람의 이야기는 더욱 임금의 귀를 움직이고 뜻을 되돌리기에 부족하겠습니다만 신들이 논사(論思)하는 직책에 있어 임금을 보필하고 인도하는 것이 임무인 이상 어찌 한갓 개인적으로 모여 걱정만 하면서 할 말을 다하고 의논을 지극히 하여 잘못한 것을 바로잡는 책임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보잘것없는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아래에 조목별로 진달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하늘을 공경하는 일입니다. 임금은 높은 지위에 있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두려워 할 것은 하늘뿐입니다. 하늘은 이치이니, 한 생각이 싹틀 때 이치에 합하지 않으면 이는 하늘을 어기는 것이고, 하나의 일을 행할 때 이치를 따르지 않으면 이는 하늘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옛적의 제왕이 매우 조심하며 상제上帝를 대한 듯 행동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정성으로 하늘을 섬기면 천명天命이 계속 아름답게 내려지지만 하늘을 어기고 이치를 거스르면 그 천명이 영원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마음은 인자하여 차마 갑자기 끊어버리지 못하니, 반드시 재이(災異)를 내려 견책한 뒤 흐리멍덩하게 깨닫지 못하여 끝내 고치지 않은 다음에야 크게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중략...

 

하늘이 멸망시키거나 사랑하여 돕는 것은 공경과 불경(不敬), 정성과 불성(不誠)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천명은 일정함이 없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가 즉위한 이후로 천문 지리 곤충 초목의 재이를 실로 낱낱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수 년 이래로 종묘의 나무에 벼락이 치고 진전(眞殿)에 불이 났는가 하면 반 년 동안 가뭄이 들고 8월에 큰물이 졌으며 벼가 쓰러지고 나무가 뽑히는 큰 바람이 불었으니, 이는 실로 근고에 없었던 변고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기수(氣數)와 관계된 현상으로 여겨 스스로 합리화시키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 크게 삼가고 두려워함이 없으며 크게 절약함이 없으며 크게 시행하고 조치함이 없습니까. 상선(常膳)을 감하고 정전(正殿)을 피하는 것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되돌릴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미워함을 사사로운 정에 따르므로 상하가 막혔으니, 하늘의 노여움이 그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게 없습니다.....중략 .....

 

재앙이나 복은 자신이 초래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잘못을 깊이 징계하고 스스로 장래의 복을 구하여 상림(桑林)의 육책(六責)으로 몸을 살펴 반성하고 운한(雲漢)의 8장으로 몸을 기울여 덕을 닦으소서. 심술(心術)의 은미한 곳으로부터 궁정의 사람 없는 곳과 동작하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이르기까지 삼가 공순하고 공경히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게 하소서. 천명을 스스로 헤아려 천리로써 보존하고 자연의 법칙으로써 움직여, 공경하고 조심스럽게 하기를 마치 효자가 어버이를 섬길 때 힘써 성의를 쌓아 기필코 즐겁게 되시도록 하는 것과 같이 하소서. 그리고 애통스런 전교를 시원스럽게 발표하여 과거의 허물을 사과하고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며 덕 있는 사람을 모두 받아들여 적소에 앉혀 쓰되 전일처럼 형식적으로 끝나지 않게 하여 재이를 소멸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또 한 가지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임금을 세우는 목적은 진실로 이 백성을 돕기 위함이지 한 사람의 편안함만을 도모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랑하면 임금이고 학대하면 원수이니, 민심의 향배에 따라 나라가 보존되거나 망하거나 하는 것입니다. 명철한 임금과 훌륭한 제왕이 백성들의 뜻이 험악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썩은 새끼줄로 6마를 모는 것처럼 조심하며 경계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던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 백성들은 지난번에 이르러 극도의 도탄에 빠졌습니다. 백성은 일정하게 사모하는 일이 없어서 인덕이 있는 이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니, 심산궁곡에서도 기뻐 춤을 추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마치 호랑이의 입을 벗어나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런 때에 백성을 보호하여 왕이 되는 것은 마치 손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유사(有司)가 위로 상의 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시정(施政)을 잘못하여 작은 비용을 아끼다가 큰 신의를 잊는가 하면 작은 사무를 먼저하고 원대한 계획은 뒤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죄를 씻어준다는 은혜가 도리어 신의를 잃는 결과가 되고 변통(變通)한다는 정사가 끝내 분란의 단서만 조성하게끔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훈신이 간혹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지도 않고 자신의 토지를 넓히려는 욕심을 다투어 채우고 있습니다. 지난 시절 농민들이 권간(權奸)에게 탈취당한 것들을 문서가 있는지도 묻지 않고 옳고 그름이 어떤지를 따지지도 않은 채 돈에 눈이 먼 사람들처럼 서로들 점유하여 한량없이 욕심을 채운 뒤에야 그만둡니다.

 

예로부터 봉지(封地)를 정하여 상을 시행할 때는 각각 제한을 두어 공의 경중에 따라 천 호戶나 만 호를 주었으니, 오늘날처럼 문란해져 질서도 없고 제한도 두지 않음으로써 듣고 보는 대로 스스로 취하도록 한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 10년간 탈취당하여 원망을 품은 채 때를 기다리던 자들의 시름과 원망이 정반대로 바뀌어 얼굴 펴며 기뻐하던 것이 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걱정거리로 변하였고 보면 지금도 그대로 전철을 밟는 꼴이 되어 주인만 바뀌었을 뿐 탈취당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니, 백성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처음에 잘못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게 된 까닭인 것입니다.

 

내수사에 투속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도 필시 들어 아셨을 것입니다. 중흥한 뒤에 발본색원은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폐단이 조금 단속되었는데, 요즈음에는 전일의 습관이 차츰 자라나 혐의 때문에 고발하기도 하고 그 주인에게 죄를 얻어 죽게 되자 도망하여 의탁하기도 하며 고역을 피해 편한 곳에 가려고 연줄을 대어 소속되기를 도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수령이 겁을 먹고 두려워하여 감히 밝게 변별하지 못한 채 본사로 귀속시키니, 먼 시골의 곤궁한 백성으로서 억울함을 제대로 해소한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 내사內司에 관계되는 일은 전하께서 마음을 비워 처리하지 못하시고 법대로 한 담당 낭청을 추고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성상의 마음이 한 편에 치우친 바가 있어서 폐단이 이 때문에 점차 일어나는데, 유사의 법 집행이 그 사이에 시행되지 못하고 액정(掖庭)의 세력 또한 당초와 다르니, 하민들만 탄식할 뿐 아니라 실로 식자들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각 아문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지난번 본관의 논차(論箚)에서 이미 다 말씀드렸기에 신들이 감히 다시 번거롭게 하지 않겠습니다마는, 오늘날 백성의 피해로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지방 사람도 물론 감당하지 못하나 서울의 백성들은 더욱 심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그 이웃과 종족까지 불법으로 탈취를 당하여 파산하고 떠돌아다니며 길거리에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모습을 전하께서는 필시 듣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전하는 백성의 부모이니, 그들의 가렵고 아픈 것을 마치 내 몸에 있는 것처럼 보아야 하는데, 어찌 백성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하십니까. 어찌 꼭 이만 말하면서 강한 의지를 분발하여 이 좋지 않은 풍습과 고질적인 폐단을 말끔히 씻어버리지 않으십니까.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겠다는 말을 신 등은 성인의 훈계로서 너무 지나치다고 마음속에 의심하였는데, 지금의 일로 보면 자못 더 심한 바가 있습니다.

 

궁가(宮家)에서 빚을 징수하는 폐단은 각 아문보다도 심합니다. 오랫동안 받지 못한 빚은 문서를 가져다가 바치기도 하고 아무 근거도 없이 몰래 청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무뢰한 종들을 풀어서 부유한 사람을 골라 누구에게 빚이 있는데 바로 채무자와 같은 친족이라고 하면서 결박을 지워 거꾸로 매달아 사제에 가둔 뒤 온갖 방법으로 학대하여 하루 사이에 수백 냥의 은자를 징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명나라 서울에 가는 역관들에게 억지로 헐값을 대어주고는 돌아왔을 적에 그 열 배나 불법으로 탈취하므로 집을 기울여 파산하고서도 제대로 상환하지 못하여 원근에 사는 족속들이 모두 피해를 당합니다. 심지어는 사방 주현의 아전들이 일 때문에 서울에 올 경우 끝까지 찾아내어 그 고을 사람이 진 빚을 모두 책임지기를 요구하면서 가두어놓고 탈취하기를 끝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방 사람들이 한번 도성 문에 들어가는 것을 마치 죽을 곳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나라를 세워 법을 설치한 뒤로 어찌 이와 같은 시대가 있었겠습니까. 대간이 이를 논하여도 죄를 가하지 못하시는 성상의 의도를 신들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은 조종의 법이니, 전하께서 어떻게 사사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해치며 법을 뛰어넘고 죄를 범하는 것이 이와 같이 심한데도 죄벌이 미치지 않고 관작이 그대로 있습니다. 궁노와 부속(府屬)까지도 사주를 받아 악행을 저지르면서 모두 태연하고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누비면서 말하기를 ‘누가 감히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데, 평민들이 이들을 보면 마치 사나운 귀신을 만난 것처럼 놀라고 두려워하여 피해 숨으니, 그 기상이 참담합니다.

 

전하께서 일찍 조치하여 특별히 엄금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방자하게 구는 걱정거리가 여기에 그치지 않아 원근의 원망이 모두 전하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조종의 법이 이로부터 폐지될 것이며 조정의 기강이 이로부터 떨어질 것이며 전하의 백성들이 이로부터 수족을 놀리지 못할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책임은 오로지 헌부에 있는데도 사사로운 위엄이 매우 왕성하므로 하리들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두려워하여 차라리 본부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감히 궁가에 거스름을 당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 임금의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고 국가의 법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헌부가 법관의 몸이 되어 어찌 하리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을 그대로 놔둔 채 기강을 진작시켜 백성을 구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재이로 인하여 백성을 구휼하라는 명이 이미 내렸으니 해조는 받들어 주선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유사의 뜻은 항상 경비를 걱정하여 궁한 백성에게 베푸는 은택이 아래에까지 내려가지 않으니, 전하께서 진정으로 측은히 여기시어 단연코 시행하지 않는 한 반드시 정체되는 폐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공부(貢賦)의 역이 지난 시절에 비해 반감(半减)되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비유하면, 혈기가 왕성할 때에는 고질적인 중병이라도 지탱해 나갈 수가 있으나 노쇠하게 되면 아주 작은 병이라도 제대로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민역(民役)이 조금 가벼워졌는데도 원망이 전과 다름이 없는 것 역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되었으니, 마치 큰 병을 이제 막 앓고 난 사람에게는 반드시 미음과 죽을 먹이고 좋은 곡식과 고기로 영양을 취하게 하며 편안한 자리에 뉘여 기혈(氣血)이 정상화되기를 기다려야 비로소 완전하게 되는 것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불행하여 변란이 서로 잇따르고 전쟁이 자주 일어나 책응할 일이 날로 많아졌으므로 백성에게 취하여 마련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이와 동시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이미 일정한 생산이 없게 되어 안정된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호패(號牌)를 폐지하자 유민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그 살 곳을 정하지 못한 채 옮겨왔다가 옮겨가므로 남아 있는 자가 얼마 없는데, 여러 명목의 역은 그대로 남아 있어 해조와 해사가 장부를 조사해 군포(軍布)를 징수하고 있습니다.

 

기타 정군(正軍)도 대부분 유랑하여 도망치므로 이웃과 종족이 피해를 입는 폐단이 다시 일어났는데, 한 사람의 도망으로 한 마을이 피해를 받아 갈수록 서로 침해하여 원근이 소란스러우니, 수령도 구원할 만한 방책이 없고 방백도 잘 처리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유랑하여 도망간 사람의 역을 전결(田結)에 책임지게까지 하고 있으니, 백성이 어찌 고달프지 않겠으며 원망이 어찌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이 폐단을 막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이 백성들이 농가에서 편안히 지내지 못할 것입니다.

 

또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대로 침해하여 재물이 이미 바닥이 났는데, 길흉간의 큰 예가 해마다 중첩되므로 대소 간에 모두 시민에게서 마련해내고 있으니, 이것이 중외(中外)가 모두 고달파지고 농민과 공상(工商)이 함께 병든 까닭입니다.

 

또 한 가지 의논이 있으니, 국사와 민사를 갈라서 두 가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상(慈詳)하고 개제(愷悌)한 사람에 대해서는 백성들을 기쁘게 하여 칭찬을 받으려 한다고 하고, 일을 잘 주선하여 능력을 자랑하는 무리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공무를 집행한다고 하여, 이를 기준으로 축출하고 승진시키며 헐뜯고 칭찬합니다. 조정이 어떤 기품을 숭상하면 원근이 그 영향을 받게 마련인데, 임금의 명을 받들어 선포하는 승지가 거꾸로 독촉하며 채근하는 행정을 하고 죄인을 매질하는 형벌이 끝내 목민관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이미 작상(爵賞)을 주어 권장하고서 또 형벌을 내려 문책한다면 방백과 수령이 자신을 구원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텐데, 관대한 법규를 펴며 어루만져 사랑하는 방도를 다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오늘부터 백성들과 더불어 낡은 것을 고쳐 새로 시작하소서. 훈신에게 하사한 문서와 당초 관청에서 적몰한 명부를 해사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서계(書啓)하도록 하고, 동시에 제도(諸道)의 방백으로 하여금 수령 중에서 억센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명한 사람을 따로 정해 죄인에게 적몰한 전민(田民)이 있는 곳에 가서 직접 부정을 적발하도록 하여, 아무 죄인의 전지는 몇 결(結) 몇 구역이며, 아무 고인은 하사받은 것이 얼마이며, 아무개는 탈취당한 곳이 몇 군데인지 낱낱이 기록을 작성하여 올려 보내게 한 뒤에 해조의 기록과 서로 대조토록 하소서. 그리하여 적몰한 것 중에 들어 있지 않은데도 불법으로 점유한 것과 지난번에 탈취당한 것을 그대로 빼앗아 점유하고 있는 것은 그 곳의 관원으로 하여금 본 주인에게 되돌려 주게 하고, 정수 이외에 많은 양을 외람되게 점유한 것은 다른 공신에게 옮겨주도록 하여 고르지 않게 불법으로 점유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는 동시에 탈취당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원망을 누그러뜨리도록 하소서.

 

내수사에 투속한 자는 해사로 하여금 문권(文券)을 조사하여 되돌려 주도록 하고, 서로 송사 중에 있거든 유사와 수령에게 맡겨서 법에 따라 처결하도록 하되 본사로 하여금 그 사이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소서. 고발하는 사람이 있으면 역시 해도와 해조로 하여금 상세히 증거를 조사하게 하여 혹시 무고일 경우에는 중한 형벌로 다스리소서. 액정서의 관원과 하인들은 외방에 심부름 보내지 못하도록 하고, 이조에 신칙하여 내수사의 모든 관유(關由)와 문이(文移)는 반드시 그 가부를 살펴서 쓸 것은 취하고 못 쓸 것은 버려 구차스럽게 따르지 않게 함으로써 조종의 옛 제도를 회복하소서. 각 아문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이익을 취하지 말도록 분명히 훈계를 내려 일체 폐지시킴으로써 그 근원을 막으소서.

 

 

그리고 헌신(憲臣)에게 명하여 연줄을 대어 폐단을 만드는 사람을 적발해서 무거운 벌로 논죄하고 용서하지 말도록 하소서. 제 궁가에서 법을 어기고 백성을 해치는 것은 탑전(榻前)에 나오게 하여 간곡하게 타이르고, 헌부에게도 단단히 일러서 궁노(宮奴)와 부(府)에 딸린 자 중에 함부로 소란을 일으키는 자나 채권(債券)을 바치거나 몰래 청탁하여 백성을 침해하는 자는 구속하여 중한 형벌을 내리고 떳떳한 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그리고 중외에 깨우쳐서 침해를 당한 사람으로 하여금 법부(法府)와 해조에 일제히 소송을 내게 하고 빼앗긴 물건을 낱낱이 찾아 주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백성들의 급박한 상황을 풀어 주소서. 명나라 서울에 갈 때 사사로운 물품의 무역을 허락하지 말고 이를 범한 자도 무겁게 죄를 물으소서.

 

재이를 구휼하는 일은 보통의 예를 따르지 말고, 임금 자신의 봉양에 대해서는 통렬히 삭감하고 특별히 면제해 주어 오직 어루만져 기르는 데 뜻을 두소서. 어사의 고강(考講)이나 점마 별감(點馬別監)의 지방 파견도 정지하고 조금 풍년이 드는 해를 기다려 하도록 하소서. 각 고을의 유망(流亡)과 절호(絶戶)에 대해서는 해도(該道)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해 선처하도록 함으로써 이웃과 종족의 폐단을 제거하소서. 응당 바쳐야 할 각종 포목의 곱고 거칠며 길고 짧은 품질도 당초의 재생청(裁省廳) 사목대로 하고 그 규정을 넘지 못하게 하소서. 이번에 재이를 입은 곳은 자세히 현장 조사하여 재이에 대한 보상을 지급하고, 다시 애처롭게 여기어 돌보아주는 은전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그리하면 절목 사이의 일은 자연 유사(有司)가 처리할 텐데 그 큰 근본은 오직 전하께서 크게 뉘우치고 깨달아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를 행하여 덕을 우선으로 삼고 이(利)를 뒤로 하며 위를 삭감하여 아래를 더해주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일을 잘 주선하는 신하를 지나치게 장려하지 말고 선량한 관리들을 지나치게 깎아내리지 마소서. 가혹한 정치는 눌러서 행하지 못하게 하고 인서(仁恕)의 도를 확대 적용하소서. 그리하여 온 나라의 백성들을 모두 널리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인덕(仁德)의 지역에 살게 하며 한 사람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하는 이가 없게 함으로써 임금의 도리를 다하소서. < 조선왕조실록 >

 

3. 백성은 나라의 근본 ~ 서하 이민서 선생

 

서하 이민서 선생은 아래의 상소문에서 민주주의 정치가 이루어지지 아니한 왕조시대에 이미 국민을 나라의 주인으로 섬기는 민주정치에 본을 보이셨다고 생각됩니다.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The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의 정신을 그보다 훨씬 이전에 말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1655년(효종7년) 5월 정언(正言) 이민서(李敏敍)가 효종에게 상소한 글이다.

 

삼백 오십 여년 전의 글인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실정에 비추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이 나라에 이러한 신하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신하의 이러한 직소(直訴)에도 아름답게 여기는 임금이 있다면...... 매일 아침 읽어 본받을 수 있다면 읽고 또 읽으련만. 이렇게 아름답고 눈물이 날 정도로 멋진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려오고 울화가 치미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

 

 

“나라의 일이 날로 위태해지고 백성이 날로 야위어 갑니다. 위태하여도 구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되고, 야위어도 돌보지 않으면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납간(納諫)과 보민(保民)에 관한 말씀을 먼저 아뢰어 보겠습니다.

 

 

 

공론은 국가의 원기(元氣)이고 간쟁(諫諍)은 공론의 근본입니다. 대개 천하의 의리는 그지없고 한 사람의 재식(才識)은 한계가 있으니, 남과 나로 가르고 공과 사로 나눈다면 어찌 천하의 착한 사람을 오게 하여 천하의 일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무릇 사람이란 겁내는 자는 많으나 굳센 마음을 가진 자는 적고 무른 자는 편안하나 곧은 말을 하는 자는 위태합니다. 임금이 너그러이 용납하고 틔어 이끌어서 할 말을 다하는 기개를 기르고, 의심 없이 들어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지 않는다면, 누가 지극히 위험한 것을 범하고 지극히 어려운 것을 행하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는 오만하게 스스로 거룩하게 여기고 홀로 총명을 행하며 한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뭇 신하를 깔보아 대신을 종처럼 기르고 대간을 개와 말처럼 대하십니다. 분주히 종사하되 뜻에 따를 뿐이고 어기지 못하니 종이 아니고 무엇이겠으며, 속박되어 달리되 울면 쫓겨나니 개와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얼굴에 잘난 체하는 기색이 나타나고 말이 편벽하여 남을 용납하지 않아 한 마디 말이라도 맞지 않으면 물리쳐 쫓는 일이 계속되므로, 대소 신하가 허물을 바로잡기에 겨를이 없고 머리를 감싸쥐고 발을 포개면서 두려워 삼가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생각하건대, 임금과 신하 사이가 현격하기는 하나 정의(情義)를 서로 보전하고 예법(禮法)을 서로 유지하는 것인데, 초개처럼 여기기만 한다면 어찌 국사(國士)로서 보답하기를 요구하겠습니까. 더구나 문사(文士)· 대부(大夫)는 임금이 심복으로 의지하는 대상입니다. 조종조에서는 매우 가까이 하는 예우를 하셨으니, 세종(世宗)· 성종(成宗) 때의 옛일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선조(宣祖)께서 이어받아 배양에 더욱 힘쓰셨는데 나라를 재건한 공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에 힘입었습니다.

 

신은 오늘날 가까이하여 믿는 자가 과연 어느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랜 나라에 친신하는 신하가 없어 심복으로 의지할 데가 없고 일을 맡겨도 통괄함이 없습니다. 벌떼처럼 일어나는 젊은이만 취하여 모아내는 일을 구차히 쾌하게 여기어 조정의 대체를 무너뜨리고 국가의 원기를 해치니, 전하께서 취사를 그릇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일에는 신하를 대우하는 예가 더욱 박하여 가두고 매 때리는 것을 가벼운 벌로 여기고 차꼬가 관원에게 두루 미치고 오라가 고관에게까지 미칩니다. 사기가 꺾여 잡류가 횡행하고 염치가 아예 없어져 명절(名節)이 땅을 쓴 듯이 없으니, 국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언로(言路)가 통하지 않는 것은 괴이할 것도 못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어질고 충실한 신하에게 심복을 맡기고 정직하고 간쟁하는 신하에게 이목을 붙여서 정성을 미루어 그들에게 맡기고 자기를 굽혀서 말을 들어 임금의 도리가 아래로 통하고 곧은 말이 날마다 들리게 하시지 않습니까.

 

《서경書經》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고 전(傳)에‘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서 왕이 되는 것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하였습니다.

 

예전부터 이제까지 백성이 편안하지 않고도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이 오늘날의 조정을 보면 이렇습니다. 정령(政令)과 베푸는 일에 조금이라도 백성을 편안하게 할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교명(敎命)이 내려질 때에 조금이라도 홀아비나 홀어미를 가엾이 여기는 뜻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의 뭇 신하 중에 남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 관한 말을 어전에서 아뢰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경외(京外)의 신하 중에 전하의 백성이 유랑하여 시달리는 정상을 대궐에 아뢰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슬픈 우리 백성이 한 해동안 내내 고생하며 근력을 다하여 조세를 바쳐도 힘이 모자라므로 몹시 근심하면서 오히려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덕의(德意)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를 돌보지 않고 바야흐로 무익한 일에 뜻을 기울이시니, 독책(督責)하는 자는 잔혹한 짓을 자행하고 재능을 뽐내는 자는 남보다 더하여 귀염을 사려고 힘씁니다.

 

추쇄(推刷)는 작은 일인데 거조(擧措)가 너무 엄중하고 과조(科條)가 너무 엄밀하며, 염초(焰硝)를 굽는 것은 말단의 일인데 나라의 반이 소요하고 갇힌 사람이 옥에 가득합니다. 서울 군사가 먹는 것은 날로 늘어 가고 경창(京倉)의 곡식이 축나는 것은 날로 많아집니다. 나라의 큰일이라면 오히려 핑계할 수 있겠으나, 한 궁가에서 쓰는 것이 수 백만금이나 되고 사사로운 자봉 (自奉) 또한 한 두 가지가 아니므로 고혈은 이미 다 짜냈고 잗단 이익까지 죄다 다툽니다.

 

법을 세워 넌지시 빼앗고 판매에 세를 매겨 교묘히 거두어들이니, 전하께서 재능과 심산(心算)이 있는 신하를 얻으시더라도 눈앞의 일만 처리한다면 또한 임금이 재물을 다스려 풍족하게 하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 근본을 맑히고 악의 근원을 막되 백성을 아끼는 것은 절용(節用)에서 시작하고 절용은 생약(省約)에서 시작하여 궁중의 용도(用度)와 군국(軍國)의 모든 수용(需用)을 다 조종 때의 옛 규례와 같이 하소서.

 

재물이 한없이 들어가는 것을 조금 멈추고 국가의 정항(正項)인 공납(供納)만으로 쓰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사치의 해독은 천재(天災)보다 심한데, 말속(末俗) 이 이미 투박해져서 참람하여도 금하지 않으니, 몸소 거친 옷을 입는 교화를 숭상하여 사치한 풍속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대저 오래 쇠퇴한 데에서 약세를 만회하여 중흥의 큰 공적을 세우는 것이 어떠한 사업인데 터덜터덜 느릿이 걸어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사의(私意)를 구차히 쾌하게 하고 대계(大計)에 소홀히 하여, 본심을 간직하는 데 있어서는 자기 허물을 듣기 싫어하고 일을 하는 데에는 먼저 백성의 재물을 다 씁니다.

 

잗단 오락에 빠져 금원(禁苑)이 놀이를 구경하는 마당이 되고 사화(私貨)를 불려 내사(內司)가 도피하는 자를 모이게 하는 수풀이 됩니다. 인척을 높여서 관방(官方)이 어지럽고 희노(喜怒)를 경솔히 써서 상벌이 어지러우며, 아첨이 풍속이 되어 사신(私臣)이 등용되고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 날로 성하여 덕을 숭상하는 것이 쇠퇴합니다.

 

깊은 궁중에서 한가히 계시는 동안을 신이 아는 바가 아니나 가무와 여색, 술이 또한 어찌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증하겠습니까. 뵙건대, 전하께서는 불세출의 자질로 큰일을 할 때가 되었고 만승(萬乘)의 자질을 가지고 여러 대를 이어온 기업(基業)을 이어 받으셨으므로 비상한 공적을 머지않아 기대할 수 있는데, 지(志)가 기(氣)에 빼앗기고 의(義)가 이(利)에 가리워서 지사(志士)가 해체되고 백성이 실망하게 하십니다.

 

전국 때 말세의 임금이 단단히 마음먹고 오래 생각하여 세운 것이 있었던 것만 못하시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상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 조선왕조실록에서 >

 

2013. 3.15.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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