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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의(義)로운 삶, 험한 길~ 동고 이수록 선생
날짜 2012-07-09 17:48:39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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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로운 삶, 험한 길~ 동고 이수록 선생

 

스스로 세운 삶의 가치와 보람을 추구하며 세상의 속된 가치와 평가에 초연하여 살아가는 것은 말과 같이 쉽지가 아니함을 새삼 느끼는 바다. 공자는 이를 聖人이라야 할 수 있다고 까지 말하였다.

 

가장 먼저 대두되는 것은 스스로 바른 인생관 가치관을 세우는 일이다. ‘배움에는 立志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뜻을 세우지 않고서 결과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그래서 몸을 닦는 공부의 조목으로 입지를 먼저 내세웠다“(율곡 이이선생 “성학집요”에서). 그러나 이는 결코 어린나이에 이루기가 어려워 보인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생각도 변화하며 성숙하여 가기 때문이다. 하늘의 섭리를 어린나이에는 이해함이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음으로는 스스로 세운 바른 인생관 가치관을 가슴에 품고 이 세상 속을 살아 나갈 때에 인간들의 罪性과 부족함으로부터 연유되어 다가오는 모진 시련과 아픔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하여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조선 중기의 명신 동고 이수록 선생은 세종대왕의 자손으로 훌륭한 선조들을 모시고 탁월한 재능과 노력으로 장원급제를 하시고 당대에 훌륭한 목민관 이며 뛰어난 문인 이었으나, 인조 후기 적신(賊臣) 이이첨의 준동으로 타락한 시대상에 저항하고 광해군의 패륜에 저항하면서, 일부러 미친 척까지 하고 스스로 일가를 이끌고 시골로 내려가 벼슬자리를 피하여 살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내면세계의 울부짖음을 달래가며, 목숨을 걸고 그 지조를 지켜 나아갔다.

 

그는 당대에는 불운한 삶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으나 그의 높은 지조와 고매한 인격과 충성이 세상에 남아 영의정에 추증되시고 그를 본받은 후손들은 아드님 백강 이경여 선생을 필두로 하여 많은 충신 명현들을 배출하면서 빼어난 명문가문을 이루게 되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바가 크므로 청음 김상헌 선생이 쓴 동고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아래에 소개한다.

 

 

1. 동고 이수록[李綏祿] 선생 신도비명

 

 

 

저자 김상헌(金尙憲)

이명 자 : 수지(綏之)

호 : 동고(東臯)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24 명류(名流)

 

 

불녕(不佞)인 나 김상헌이 어렸을 때 여러 형들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동고(東臯) 이공(李公, 이수록(李綏祿)을 말함)과 교제하게 되었는데 나이가 늙어서는 더욱 서로 좋아하였다. 공은 일찍이 나를 알아주었으나 불녕은 스스로 두려워하여 공의 지감(知鑑)을 저버림으로써 나를 알아준 벗의 밝은 식견에 누(累)를 끼쳤다.

 

공을 장사지낸 뒤에 묘각(墓刻)을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불녕인 내가 재주가 없어서 사양하고 감히 감당하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도록 해내지 못하였으니, 나는 실로 공을 저버린 셈이다. 아! 그만 둘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삼가 행장(行狀)을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수록(綏祿)이요 자(字)는 수지(綏之)이며 자호(自號)는 동고(東臯)이다. 선계(先系)는 선원(璿源, 왕족인 전주 이씨를 말함)에서 나왔고, 우리 장헌 대왕(莊憲大王, 세종)의 6대손(代孫)으로 손자이신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과 운산군(雲山君) 이계(李誡)가 부자(父子)로서 공훈을 세워 종정(鐘鼎)에 이름이 새겨지고 그 아름다움을 세습(世襲)하였다. 운산군이 광성정(匡城正) 이전(李銓)을 낳았고, 광성정이 광원수(廣原守) 이구수(李耈壽)를 낳았으며, 광원수가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이극강(李克綱)을 낳았는데, 이 분들이 공의 3대(代)이다. 뒤에 증손(曾孫)의 신분이 귀해진 까닭에 광원수는 군(君)에 추봉(追封)되고, 첨정공(僉正公, 이극강을 말함)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과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공은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증직되었는데 부인(夫人)들도 모두 지아비의 직질(職秩)에 따라 봉증(封贈)되었다.

 

찬성공(贊成公, 이극강을 말함)은 일찍부터 공거(公車)의 명성이 있었고 명경(明經)으로써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성품이 강직하여 곧잘 남을 거역하였으므로 벼슬에 쓰이지 못한 채 세상을 마쳤는데, 온양(溫陽) 정모(鄭某)의 딸을 아내로 맞아 가정(嘉靖) 갑자년(甲子年, 1564년 명종 19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함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7, 8세 되던 무렵에 남들이 글을 읽는 소리를 듣고 대번에 암기(暗記)를 해냈으므로 보는 자들이 기특하게 여겼으며, 조금 자란 뒤에는 문사(文辭)가 나날이 넉넉해져 성명(聲名)을 더욱 크게 떨쳤으므로 공과 비슷한 또래로서 공보다 앞서 나아간 자가 드물었다. 15세 때 발해(發解, 향시(鄕試)를 말함)에 응시하였는데 고관(考官)들이 공의 글을 외우면서 서로 인재를 얻었음을 경하(慶賀)하였으며,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뽑혀 보임(補任)되었다.

 

공은 어린 나이에 과거에서 장원으로 뽑혔고 풍채가 두드러져 출입할 때 서너 사람을 그림자처럼 대동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에게 눈길이 쏠렸다.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지내면서 자식으로서의 예법을 다하였고 상기(喪期)가 끝나자 본원(本院)에서 정자(正字)ㆍ저작(著作)ㆍ박사(博士) 등에 전임(轉任)되었다. 사론(士論)이 “공은 마땅히 임금 좌우(左右)의 사관(史官)으로 있어야 한다.” 하였는데, 공은 평소에 요로(要路)에 드나든 자취가 없었으므로 이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공을 추천하는 자가 없었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전례에 따라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겨 임명되었고 삼자함(三字銜, 지제교(知製敎)를 말함)을 겸대하였으며 곧이어 정랑(正郞)에 승진하였다. 조정에서 장차 공을 대성(臺省)에 있게 하려고 하였으나 공은 고념(顧念)하지 않고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 서산 군수(瑞山郡守)가 되었다. 그 무렵에 병란(兵亂)과 기황(饑荒)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열 명에 칠팔 명은 죽거나 도망하였는데 공은 몸소 백성들을 가족처럼 어루만져 보살피고 정성스레 먹여주자 유랑(流浪)하거나 달아났던 자들이 나날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에 공은 창고의 곡식을 모두 풀어서 그들을 진휼(賑恤)하고 둔전(屯田)을 넓게 설치하여 그들이 경종(耕種)하도록 권장하였는데, 가을이 되자 크게 풍작이 들어 공사(公私)간의 걱정이 모두 해결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즐겁지 못한 일이 있어서 벼슬을 버리고 고을을 떠나게 되었는데 고을 백성들이 공을 빙 둘러막아 지키면서 떠나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다. 이에 공은 꾀를 내어 밤중에 고을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와서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 않으니, 아전과 백성들이 오랜 뒤에까지 공을 추사(追思)하였으며 서로 비석을 새겨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한참 지난 뒤에 다시 외직으로 나가 곽산 군수(郭山郡守)가 되었는데 정성을 다해 너그럽게 포용하자 고을 백성들이 공을 사랑하고 믿었으며 무릇 호령(號令)을 시달하면 이러쿵저러쿵 따져 번거롭게 하는 일이 없었다. 공의 치적(治績)이 가장 우수하다고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이 비단을 하사하여 포상하였고, 공이 고을을 떠난 뒤에 백성들이 서산(瑞山)에 재임하였을 때처럼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공의 덕정(德政)을 송축하였다.

 

다시 조정에 들어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고 예전과 똑같게 지제교(知製敎)를 겸대하였고, 누차 개임(改任)되어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과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지낸 뒤에 수찬(修撰)과 부교리(副校理)에 승진하여 응교(應敎)에 이르렀다. 그 무렵에 상공(相公) 이원익(李元翼)이 서북면(西北面) 지역을 체찰(體察)하게 되자 공을 추천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이리저리 일을 계획하고 협찬하여 도움을 준 것이 컸으며, 이때 곤수(閫帥) 중에 공과 더불어 문족(門族)이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공에게 음식을 보내어 문안을 하려고 하였으나 공이 나무라면서 음식을 도로 물리쳤으므로 그 뒤로 감히 사적(私的)인 일로 공을 찾아오지 않았다. 체상(體相, 이원익)이 그 소문을 듣고 기뻐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군(李君, 이수록을 말함)을 얻어 막부(幕府, 체찰사(體察使))가 존엄해졌다.” 하였다. 일 때문에 조정에 돌아왔다가 직숙(直宿)에 시달려 병세가 급박하였는데 임금이 어의(御醫)를 두 사람이나 보내어 번갈아서 병세를 살피게 해주고 궁중에서 조제한 약물(藥物)을 나누어 하사하여 그 은수(恩數)가 대신을 예우해주는 것과 똑같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 일을 영예롭게 여겼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에는 정인(正人)을 미워하는 어떤 자가 남을 사주(使嗾)하여 투서(投書)를 하도록 하자 못된 무리들이 앞다투어 일어나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한 시대의 사류(士類)들을 모조리 축출하였는데 이때 공도 폄직(貶職)되어 대동도(大同道) 마관(馬官, 찰방(察訪))이 되었다. 그러자 공의 친척과 오랜 벗들이 서로 공을 위문(慰問)하였는데 공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폄직된 것을 개의(介意)하지 않고서 봉직(奉職)하기를 더욱 성실하게 하여 우정(郵政, 역참(驛站)의 정사(政事)를 말함)이 제대로 정돈되고 다듬어졌으므로 벼슬아치로서 서로(西路)를 경유하여 다니는 자들이 모두 공이 매사를 법대로 처리하고 흔들리지 않는 점을 꺼려하여 마침내 역참(驛站)이 크게 활기를 되찾았다.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왔고 얼마 지난 뒤에 내자시 정(內資寺正)으로 승진하였으며,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로 개임(改任)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며, 면직되어 돌아왔다가 다시 외직으로 나가 봉산 군수(鳳山郡守)가 되었고, 얼마 후에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가 다시 외직으로 나가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 영남(嶺南)은 풍속이 평소에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고 게다가 상주(尙州) 고을은 지역이 넓고 소송(訴訟)이 번다(繁多)하여 그곳의 목민관(牧民官)이 된 사람들은 그러한 점을 병통으로 여겼는데, 공은 한결같이 청간(淸簡)함으로써 번거로움을 다스렸고 그 여가(餘暇)에는 고을의 자제(子弟) 중에 배우려고 하는 자들을 끌어들여 면전에서 가르치고 일깨워주면서 쉬지 않고 강독(講讀)을 하자, 온 경내(境內)가 크게 기뻐하였으며 유식(有識)한 사람들도 다들 공을 의지하고 우러러 존경하였다.

 

얼마 후에 면직되어 돌아와서 상의원(尙衣院)ㆍ봉상시(奉常寺)의 정(正)과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고, 천거를 받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제수되어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대(兼帶)하였다. 이어 병 때문에 면직되었다가 재차 판교(判校)와 응교(應敎)를 지낸 다음에 종부시 정(宗簿寺正)으로 이임(移任)되어 영남(嶺南)에 사명(使命)을 받고 내려가서 옥사(獄事)를 조사하였는데, 대부인(大夫人)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공은 몹시 걱정이 되어 상소를 올려 휴가를 청하였으나 회보(回報)를 기다리지 않고서 즉시 길을 떠났으므로 이 일 때문에 파직되었다. 곧이어 태복시 정(太僕寺正)에 임명되었다가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나갔고 다시 들어와서 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중서(中書)ㆍ옥당(玉堂)ㆍ괴원(槐院) 및 제시(諸寺)의 정(正)에 3, 4번씩이나 전임(轉任)되었는데 혹은 배명(拜命)하지 않았고 혹은 소신을 굽혀 취임하였다가 즉시 그만두기도 하였으며, 한번도 벼슬자리에 오래 안주(安住)한 적이 없었다.

 

이 무렵에 얼신(孼臣, 이이첨(李爾瞻)을 말함)이 권병(權柄)을 훔쳐 국정(國政)이 나날이 혼란해졌으므로 공은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려 벼슬살이에 뜻을 끊고서 거짓으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여 스스로 자신을 숨기고 지냈는데,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공은 온 가족을 데리고서 양근(楊根)의 강가로 돌아가서 완평(完平) 이상(李相, 이원익을 말함), 수몽(守夢) 정엽(鄭曄)공과 더불어 서로 산수(山水)를 찾아다니며 종유(從遊)하였다. 얼마 후에 다시 기용(起用)되어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임명되고 품계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였으나 병 때문에 사직하였다가 경신년(庚申年, 1620년 광해군 12년) 모월(某月)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춘추(春秋)가 57세였다. 모년(某年) 모월(某月)에 양근군(楊根郡) 백운봉(白雲峰) 아래에 장사지냈는데 간좌(艮坐)의 언덕이다.

 

공은 사람됨이 겉으로는 온화하고 수더분하였으되 내면은 강직하고 모난 데가 있어서 남들과 함께 지낼 때 상대가 좋은 사람이면 자기 마음을 온통 기울여 내보이고 조금도 감추거나 남겨두는 것이 없었으며, 탐욕스럽고 간사하거나 남에게 아첨을 부리는 사람을 보면 비록 상대가 귀신(貴臣)이나 요인(要人)일지라도 면전에서 배척하고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간혹 낯이 빨개져서 앙심을 품고 기어가듯이 자리를 피해 달아나는 자도 있었다. 또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겨 대부인(大夫人)의 곁에서 모시면서 사고(事故)가 아니면 한번도 무릎 아래를 떠난 적이 없이 공손한 태도로 곁을 지켰으며,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마치 어린애처럼 재롱을 피우며 모부인을 즐겁게 해드리다가 비로소 찬성공(贊成公)의 상(喪)을 당하여 거상(居喪)하게 되자 향리(鄕里)의 나이 많은 노인들이 말하기를, “이군(李君, 이수록을 말함)처럼 효도를 다해야만 그야말로 친상(親喪)을 치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였다. 부모의 기일(忌日)을 만날 때마다 거친 옷으로 갈아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종일토록 울먹이면서 슬퍼하였다. 대부인이 병에 걸리자 공은 탕제(湯劑) 같은 것들을 몸소 자기 손으로 하였고 자제(子弟)들이 대신하겠다는 청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대부인이 친척들 중에 살림이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어주기를 좋아하여 집안에 있거나 없는 것을 따지지 않고 남에게 베풀어주었는데, 공의 자제들은 간혹 살림을 계속 꾸려나가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마땅히 어머니의 뜻을 힘껏 받들어 따라야 한다. 어머니의 뜻을 상(傷)하게 해서야 되겠느냐?” 하였다. 공이 영예로운 벼슬살이를 추구하지 않았으면서도 몸을 굽혀 고을을 맡아 다스리면서 부지런히 애쓰기를 수십 년이나 하면서 싫증을 내지 않은 것은 모두 대부인의 뜻을 받들기 위한 물건들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형제들 사이에 오순도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지극하였으되 또한 서로 절차(切磋)하여 도와주는 면이 있었고, 심지어 궁핍하게 사는 족인(族人)들을 거들어 보살펴주고 고아(孤兒)들을 훈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취하고 귀의(歸依)할 곳을 잃지 않도록 해주었으니, 공의 내행(內行)이 순전(純全)하고 골고루 갖추어진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벼슬을 맡아서 직무를 지킬 때에는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만을 생각하였다. 경악(經幄)에 재임할 때에는 옛 제도를 고찰해서 지금의 일을 증명함으로써 개발(開發)하고 이끌어 강관(講官)으로서의 체통을 얻었으며, 대석(臺席, 대간(臺諫)을 말함)에 재임할 때에는 지론(持論)이 깐깐하여 줏대 없이 남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세 도(道)의 감사(監司)가 그 적임자를 얻지 못하여 민력(民力)을 가볍게 여기고 뇌물을 밝혔는데 품계가 높은 고관이 그를 든든하게 후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아무도 그들을 논박하지 못하였으나 공이 모두를 한꺼번에 탄핵하여 백성들이 도탄(塗炭)에서 풀려났으며, 또 행실이 더러운 고관에게 빌붙어 전부(銓部, 이조(吏曹))의 낭관(郎官)이 된 자가 있었는데 언로(言路)가 그들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고개를 내흔들고 혀를 내둘렀으나 공은 탄식하기를, “이는 주발(周鉢)에 개똥을 담은 셈이다.” 하고서, 즉시 탄핵하여 제거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또 어느 탐욕스러운 수령이 있어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장차 그를 탄핵하려고 하자 공의 어떤 동료가 말하기를, “자네는 이 사람이 모(某) 재상(宰相)의 가까운 친속(親屬)인 줄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정색(正色)하고서 말하기를, “자네는 임금의 눈과 귀를 집정(執政)의 사인(私人)으로 만들려고 하는가?”라고 하자, 그 사람은 부끄럽게 여기고 말문이 막혀 감히 다시는 그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관서(關西)의 역관(驛官)으로 재임할 때에는 어떤 대관(大官)이 말을 역참에 바치고 그 삯을 갑절로 받아내려고 하였는데, 공이 그것을 거절하여 물리치고 서찰을 보내 꾸짖기를, “재상(宰相)이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다니, 이 어찌 옛사람이 채마밭의 아욱을 뽑아버린 뜻1)이겠소?” 하니, 그 대관이 몹시 섭섭해하더니 마침내 뇌물 때문에 패가(敗家)하였다. 공은 여섯 고을의 목민관(牧民官)을 역임할 때에도 홀아비와 과부들을 불쌍히 여기고 호강(豪强)한 자들을 억제하였으며, 해묵은 폐단을 말끔히 없애 오로지 백성들을 편하게 해주려고 힘썼으므로 교활한 아전들이 행동을 조심하고 감히 그 못된 수작을 부려볼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특히 바쁜 일을 척척 처리하는 재능이 뛰어나서 하나도 지체되는 일이 없었으므로 고을 안이 청정(淸靜)해졌다.

 

평생 동안 아무 것도 기호(嗜好)하는 것이 없어서 무릇 성색(聲色)이나 재화(財貨)를 비롯하여 노리개를 갖고 노는 것이나 화려하게 꾸미는 일들은 모두 쓰지 않았다. 벼슬이 파면되어 집에 돌아와 지낼 때에는 처자(妻子)들이 경제적인 곤란을 면하지 못하였는데도 집에 있을 때에는 누추한 방에서 지내고 음식을 담담하게 먹었으며 밖에 나갈 때에는 말라빠진 조랑말에 해어진 안장을 얹어 타고 다니면서 베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남들은 그 괴로움을 견뎌내지 못하였으나 공은 마치 엿처럼 달갑게 여겼다.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공의 종제부(從娣夫)였는데 매양 달콤한 말로 공을 유혹하였으나 공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이첨이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추기(樞機)를 자세히 살펴 머리를 돌려서 오라.”는 등의 말을 하였는데, 겉으로는 공을 규계(規戒)하는 것처럼 하였으나 실제로는 공을 유혹하는 것이었다. 이에 공은 답신을 보내기를, “천종(千鍾)의 녹봉(祿俸)도 한 잔의 술에 맞먹지 못하는데 눈에도 차지 않을 복(福)이 어찌 세상에 넘치는 앙화(殃禍)를 당하겠소. 공은 나를 걱정하지 마시오. 나야말로 공이 걱정되오. 각자 좋아하는 바를 좇을 따름이니, 아마 머리를 돌릴 날은 없을 것이오.” 하자, 이이첨이 비록 감히 공을 해롭게 하지는 못하였으되 이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마음 속에 앙심을 품었다. 한찬남(韓纘男)이라는 자는 이이첨의 패거리인데 공에게 연척(聯戚)이 되는 자였다. 공은 그 자를 좋지 않게 여겨 서로 왕래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어떤 사람의 혼인(婚姻) 잔치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공이 술을 얼큰하게 마신 뒤에 모자(帽子)가 비뚤어졌는데 한찬남이 공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여보게, 자네 모자가 위태롭네.” 하자, 공이 껄껄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 눈에는 아저씨의 머리가 매우 위태로워 보이니, 더욱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한찬남이 깜짝 놀라 아무 대꾸를 못하였는데, 마침내 공이 말한 것과 같게 되었다. 처음에 공과 더불어 교유하는 자들은 공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함부로 말하는 것을 보고서 모두 공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는데, 공이 끝까지 화기(禍機)를 멀리할 수 있었던 것은 공이 술에 의탁(依托)하여 스스로 재주를 감추는 일을 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에서야 곧 공이 지난날에 했던 행동들이 정말 미쳐서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고, 그 거짓으로 미친 척하는 것을 아무나 쉽게 따라하지 못할 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의 문장(文章)은 천연적(天然的)으로 얻어진 것이 많았으므로 평상시에 이리저리 깎아내어 다듬느라고 각의(刻意)하지 않았으며, 득의(得意)하여 붓을 휘두르면 마치 드넓은 바다처럼 출렁이어 범위가 광범하면서도 격률(格律)이 창연(蒼然)하였다. 선조[穆廟]가 인재들을 대대적으로 육성하여 당시에 재주 있는 선비들이 아주 많았다고 일컬어졌는데 사원(詞苑)에서 사람들의 재주를 논할 때마다 공의 이름이 반드시 그 안에 들어있었다. 상(喪)을 당하여 걱정이 있을 때에는 문사(文事)에 힘쓸 겨를이 없었으나 빼어난 글재주를 겨루는 성대한 모임에는 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서 공을 기다렸는데 공은 문자(文字)에 대해서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그 나머지를 써서 정사(政事)에 시행하였는데, 마침내 단지 현량(賢良)한 목민관(牧民官)으로서만 세상에 알려졌으므로 공을 참으로 아는 자들은 다들 그 점을 아쉽게 여겼다. 공이 저술한 시문(詩文)들을 집안에 소장하였으나 마침 가환(家患)이 있어 집안사람이 실화(失火)하는 바람에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

 

공은 평소에도 술을 좋아하였는데 만년(晩年)에는 더욱 지나칠 정도로 술을 즐기면서 시대를 잘못 만난 처지를 스스로 서글퍼하며 술을 마시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공을 술꾼[酒人]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에는 대부분 문을 닫아걸고 눈물을 흘렸고 간혹 혼자 어딘가를 갔다가 돌아오지 않기도 하였다. 손수 제갈 무후(諸葛武侯,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出師表)≫와 도 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담암(澹菴, 송나라의 호전(胡銓))의 상소문(上疏文)을 써서 방안의 벽에 걸어두고서 날마다 잠자고 일어나면 소리내어 읽었으며 모두 읽고 나면 목이 메이도록 흐느껴 울면서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 공의 자제들이 간혹 틈을 타서 공에게 넌지시 술 좀 적게 들라고 말하니,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말도 옳기는 하다. 그러나 옛 사람 중에는 모래주머니를 껴안고 물에 뛰어든 사람2)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정말 종묘와 사직이 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였으며,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은 사람을 현자(賢者)들이 잘못하였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물며 내가 술을 마심으로써 걱정을 잊어보려는 것에 대해서야 무슨 까탈을 잡겠느냐?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려있으니 더러움을 허물벗듯이 씻어내고서 저승에서 선인(先人)을 따르게 되면 나는 여한(餘恨)이 없을 것이다.” 하였고, 그로 인하여 밥을 먹는 일조차 여러 달을 폐(廢)하였으며 병이 위독해졌는데도 약(藥)을 가까이하려 하지 않더니, 어느 날 맏아들의 손을 잡고 영영 결별하면서 말하기를, “올바르게 살다가 죽으니 나는 편안하게 눈을 감을 것이다. 다만 너희들은 훗날에 망국(亡國)의 대부(大夫)가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구차하게 죄를 면하여 조상들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마침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공은 약관(弱冠)에 사적(士籍)에 진출하여 더불어 사이좋게 교제한 사람들이 모두 한 시대의 유명한 인사들이었는데 10년이 지난 뒤에 공의 또래들은 모두 이미 공경(公卿)에 승진하였으나 공만 유독 승진이 지체되어 현달하지 못하였다. 재능을 짊어지고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끝까지 기색이나 언사(言辭)에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어찌 함양(涵養)한 바가 없이 그렇게 하였겠는가? 아! 공으로 하여금 크게 쓰일 바가 있지 못하게 하여 관위(官位)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녹봉(祿俸)도 충분하지 못하고 나이까지도 장수를 누리지 못하도록 한 것은, 어찌 하늘이 아직 정해주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덕(德)을 베풀면 그 보답을 받게 되는 법인지라, 훌륭한 아들이 그 복경(福慶)을 물려받아 임금을 보필하는 재상이 되어서 기대와 촉망을 크게 실현하였으니, 군자(君子)들은 이 일에서 하늘이 정해주는 바가 있음을 알 것이다.

 

공의 부인(夫人)은 진천 송씨(鎭川宋氏)로서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된 송제신(宋濟臣)의 딸인데, 태어날 때부터 현숙한 자질이 있었고 어려서부터 여자로서 배워야 할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책들에 대해서 그 대의(大義)를 통하고 사리(事理)를 이해하였다. 시집을 오기 전에도 얌전하다는 평판이 있었고 공에게 시집온 뒤에는 시부모를 섬김에 있어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랐으므로 시부모들도 매우 부인을 중(重)하게 여겼다. 의정공(議政公, 이수록의 부친인 이극강)의 형제와 자매들이 여덟 명이나 되고 남녀 생질(甥姪) 및 여러 시어(侍御)와 비사(婢使)들이 또 수십 명이나 되었는데 부인은 그들 사이에서 일을 주선하면서 그들을 대함에 있어 각기 그에 맞는 도리를 다하였으므로 온 집안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도 남을 이간질하는 말이 돌지 않았고, 문중(門中) 사람들이 부인을 추중(推重)하여 여범(女範)으로 삼았으며 자녀들이 혹시 과오를 저지르거나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따끔하게 나무라고 그냥 용서해준 적이 없었다.

 

또 부인은 친정이 본래 부잣집이었는데 시아버지인 의정공(議政公)이 재화(財貨)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므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세업(世業)이 이리저리 흩어져 없어졌는데, 부인이 몸소 자기부터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손수 여자들이 하는 길쌈이나 바느질을 함으로써 살림살이가 부족하지 않게 하였으며, 손님들을 접대하는 술과 음식 등을 포함하여 안팎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비용에 이르기까지 오직 대부인(大夫人) 및 의정공이 하고 싶어하는 대로 따라 하면서 힘을 다해 그 뜻을 받들었으되, 또한 그렇게 마련하기가 수월하지 않았음을 시부모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였다.

 

두 번이나 변란(變亂)을 당하였는데 맏아들이 임금의 피난길을 호종(扈從)하려고 부인에게 하직할 무렵에 허둥지둥 방황하면서 차마 모친 곁을 떠나지 못하자, 부인이 아들에게 권면하기를, “네가 이미 벼슬길에 나서서 임금을 섬겼으니 난리를 당하여 임금을 뒷전으로 여기면 의롭지 못하다. 어서 길을 떠나고 나를 염려하지 말아라.” 하였다. 또 뒤에 맏아들이 호서(湖西)를 안찰(按察)하게 되었을 때 부인은 그에 앞서 이미 본도(本道)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는데, 모자(母子)가 서로 만날 때마다 반드시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너는 네 아버지가 관직에 있을 때에 경비를 줄이고 절약하기에 힘쓰신 것을 잊지 말고, 나 때문에 한 고을에 원망을 초래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으며, 그 뒤에 아들이 은가(恩暇)를 청하여 청주(淸州)로 달려가 모친을 찾아뵙고 물건들을 장만하여 모친에게 공양(供養)하자, 부인은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민력(民力)이 고갈되었으니 틀림없이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숙수(菽水)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나만 홀로 무슨 마음으로 이런 것들을 누리겠느냐? 봉록을 받지 않고 남에게 은혜를 미루어주면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하겠다.” 하였으므로, 그 말을 들은 자들이 탄복하였다. 또 전후로 임금에게 내려 받은 은사(恩賜) 물품과 친척으로서 고을의 수령을 지낸 자들이 보내준 선물 등도 번번이 살림이 어려운 친족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조금도 아까워하는 것이 없었다. 임종(臨終)할 때 맏아들에게 이르기를, “너는 덕(德)이 돌아가신 네 아버지보다 못한데도 녹봉과 지위는 네 아버지보다 더 많고 높으므로 나는 항상 그 점이 염려스럽다. 더욱 성실하게 일하고 행실을 조심하여 너를 낳아준 부모들을 욕되게 하지말고, 충효(忠孝)와 인후(仁厚)로써 스스로 면려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거라.”라고 타이른 뒤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은 75세였고 이때가 곧 모년(某年) 모월(某月)이었으며, 그해 모월에 의정공(議政公)의 묘소 오른쪽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인 이경여(李敬輿)는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이다. 삼대(三代)가 영전(榮典)을 추증(追贈)받은 것은 모두 그가 벼슬이 높아져서 추은(推恩)한 것이다. 작은 아들인 이정여(李正輿)는 재주와 행실이 있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공보다 앞서 일찍 죽었다. 장녀는 요절(夭折)하였고 작은 딸은 현감(縣監)인 한무(韓楙)에게 시집갔다. 의정(議政, 이경여를 말함)의 초취(初娶) 부인은 영의정(領議政) 윤승훈(尹承勳)의 딸인데 자녀를 낳지 못하였고, 재취(再娶) 부인은 감역(監役) 임경화(任景華)의 딸인데 4남 2녀를 낳았다. 그 장남은 이민장(李敏章)이고 차남은 이민적(李敏迪)이며 그 아래는 아직 어리다. 측실(側室) 소생의 2남이 있는데 아직 어리다. 현감(縣監, 한무를 말함)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한오상(韓五相)이고 차남은 한오취(韓五就)이며 큰딸은 신훤(辛暄)에게 시집갔고 그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이민장(李敏章)은 2남을 낳았고 한오상은 1남을 낳았다. 생원(生員, 이정여를 말함)은 아들이 없어서 이민적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다음과 같이 사(辭)를 쓴다.

 

공을 미친 것으로 여긴 자들은 봉황새를 노래한 사람의 부류3)가 아니겠는가? 공더러 한 시대를 슬퍼했다고 말한 자들은 좌도(左徒)의 무리4)가 아니겠는가? 나이가 어려서부터 부모를 흠모하였고 나이가 늙어서도 효심이 시들지 않은 것은 노래자5)(老萊子)의 아름다운 품행에 가까운 셈이었네. 재능을 감추어 그 자취를 스스로 더럽히고 남을 격동하여 그 뜻을 밝힌 것은 동방삭6)(東方朔)의 척당(倜儻)함을 본받은 셈이었네. 아들을 가르칠 때에는 절의(節義)가 중요함을 우선으로 여겼고, 집안을 다스릴 때에는 화순하고 정직한 덕(德)을 드러냈으며, 강연(講筵)에 참여하여 임금에게 계옥7)(啓沃)을 다하였고, 대헌(臺憲)으로 재임할 때에는 입바른 말을 다하였네. 기름진 고을에 살면서도 청렴한 절조를 바꾸지 않았고, 산간 고을을 다스릴 때에도 더욱 어진 수령으로 칭송을 받았네. 나는 공의 덕(德)을 뭐라고 일컬을 수 없으되, 선인(善人)과 군자(君子)로서 불행한 시기를 만나서도 그 올바름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기네. 내 말이 아첨하는 것이 아님을 비석에 새겨 증명하네.

 

각주

1) 한대(漢代)에 공의휴(公儀休)가 노(魯)나라의 재상(宰相)으로 재직할 때 백성들의 이익을 빼앗지 않으려고 자기 집의 채마밭에 있는 아욱을 뽑아버리고 집안의 베 짜는 여자들을 없애버린 일을 말한다.

2) 전국(戰國)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이 참소를 당하자 회사부(懷沙賦)를 지은 뒤에 사석(沙石)을 껴안고 멱라수(汨羅水)에 투신(投身)하여 자결한 일을 말함.

3) 초(楚)나라의 광인(狂人) 접여(接輿)가 공자(孔子)를 봉(鳳)새에 비유하여 노래하기를, “봉새여, 봉새여, 덕(德)이 쇠(衰)하였는데 어찌할까?”라고 하여, 세상이 어지러운데도 정치 현실에 참여하는 공자를 풍자하였다. 곧 봉새를 노래한다는 것은 세상을 피하여 은거하거나 세속을 초월하여 담담하게 생활함을 비유함.

4) 좌도(左徒)는 전국(戰國) 시대 초(楚)나라의 관직 이름인데, 여기서는 초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굴원이 회왕(懷王) 때에 좌도라는 벼슬을 지낸 일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후세의 좌습유(左拾遺)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5) 노래자(老萊子) : 춘추(春秋) 시대 초(楚)나라의 은사(隱士)로서 줄여서 내자(萊子)라고도 한다. 효심이 지극하여 나이가 70세나 되었는데도 부모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서 부모 앞에서 재롱을 피웠다고 한다.

6) 동방삭(東方朔) :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신하로서 자(字)는 만천(曼倩)이다. 예절이나 규범에 구애받지 않고 대범하게 행동하였으며, 기발한 계책을 곧잘 짜내고 우스갯소리를 잘하여 무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벼슬이 태중 대부(太中大夫)에 이르렀고 저술에 ‘답객난(答客難)’ㆍ‘비유선생론(非有先生論)’ㆍ‘칠간(七諫)’ 등이 있다.

7) 계옥(啓沃) : 신하가 임금에게 나라를 다스릴 방법을 제시하여 임금의 마음을 개도(開導)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의 열명편(說命篇)에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신하인 부열(傅說)에게 당부하기를, “너의 속마음을 활짝 열어서 나의 마음에 물을 주듯이 해달라.”고 당부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출처 : 국역 국조인물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 동고 이수록 선생이 남기신 여운(餘韻)

 

동고 선생으로부터 모름지기 인생이란 사후에 이루어질 일까지도 바라보고 살아 가야할 것임을 배운다.

 

특히 위의 동고공 신도비명 중에서 광해군의 폐모론 등 패륜으로 벼슬길에서 스스로 물러난 이후 모습을 그린 다음 대목이 가슴을 울린다. (동고공의 아드님이신 백강 이경여 선생도 광해군 말엽에 벼슬길에서 스스로 물러나시었다가 인조반정이후에 다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오셨다. 그러나 동고공은 인조반정 이전에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공이 혼자 있을 때에는 대부분 문을 닫아걸고 눈물을 흘렸고 간혹 혼자 어딘가를 갔다가 돌아오지 않기도 하였다. 손수 제갈 무후(諸葛武侯,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出師表)≫와 도 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담암(澹菴, 송나라의 호전(胡銓))의 상소문(上疏文)을 써서 방안의 벽에 걸어두고서 날마다 잠자고 일어나면 소리내어 읽었으며 모두 읽고 나면 목이 메이도록 흐느껴 울면서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 공의 자제들이 간혹 틈을 타서 공에게 넌지시 술 좀 적게 들라고 말하니,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말도 옳기는 하다. 그러나 옛 사람 중에는 모래주머니를 껴안고 물에 뛰어든 사람2)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정말 종묘와 사직이 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였으며,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은 사람을 현자(賢者)들이 잘못하였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물며 내가 술을 마심으로써 걱정을 잊어보려는 것에 대해서야 무슨 까탈을 잡겠느냐?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려있으니 더러움을 허물벗듯이 씻어내고서 저승에서 선인(先人)을 따르게 되면 나는 여한(餘恨)이 없을 것이다.” 하였고, 그로 인하여 밥을 먹는 일조차 여러 달을 폐(廢)하였으며 병이 위독해졌는데도 약(藥)을 가까이하려 하지 않더니, 어느 날 맏아들의 손을 잡고 영영 결별하면서 말하기를, “올바르게 살다가 죽으니 나는 편안하게 눈을 감을 것이다. 다만 너희들은 훗날에 망국(亡國)의 대부(大夫)가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구차하게 죄를 면하여 조상들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마침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위의 내용은 동고 선생이 광해군의 패륜 등으로 어지러워진 세상을 한탄하며 망국의 앞날을 예견하였으나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깨끗이 자결한 것이나 같다.

 

신도비를 쓴 청음 김상헌 선생도 끝에 동고공을 평하여 “선인(善人)과 군자(君子)로서 불행한 시기를 만나서도 그 올바름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기네”라고 말하여 동고공의 행적을 요약하였다.

 

음식을 전폐하면서 까지 지켜나간 공의 지조와 충성과 개결(介潔)함에 참으로 놀라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는 면이 있다. 생명은 하늘이 내린 가장 귀한 존재인데 동고공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이외에는 달리 없었을까하는 회의이다.

 

예수교의 시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생명은 자기의 것이 아닌 만큼 함부로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살아있는 한 하나님의 주신 사명이 있는 것으로 이를 찾아 힘써 실천하여 나가야하는 것이며, 이것이 來世의 축복을 기약하는 길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동고공이 사시던 시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道는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아니한 때였다.

 

만일 동고공이 스스로 건강을 돌보셨다면 인조반정을 보시고 큰 듯을 펴실 기회도 있으셨을 것이고 (동고공 본인은 인조반정을 전혀 예견하지 못하셨겠지만), 적어도 학문과 인격을 더욱 닦아 후세에 더 좋은 귀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다만 한편으로는 동고공의 자손된 자로서 과연 내가 세상의 不義함을 보고 스스로 그렇게 자결할만한 용기가 있는지, 도무지 자신이 없으니 부끄럽기 만한 것이다. 신약성경에 베드로(St. Peter)가 예수를 핍박하는 대중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고 나서 물러나와 대성통곡하는 모양이 나의 일이 될 것만 같다.

 

아! 인생을 사람답게 살아가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니, 어떻게 날마다 하늘의 道理를 공부하고 인격과 품성을 연마하는 일에 소홀할 수 있겠는가!

 

2012. 7. 9. 동고 이수록 선생 13대 손 이 주 관 씀

 

 

◈ 이수록 선생 신도비(향토사적 제 1호)

 

이수록[1564(명종 19)∼1620(광해군 12)]선생은 조선중기(朝鮮中期)의 문신으로 자는 유지(游之), 호는 동고(東皐), 본관은 완산(全州), 첨정(僉正)극강(克綱)의 아들이다.

 

선조(宣祖)18년(1585) 진사,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병조좌랑(兵曹佐郞), 사예(司藝).정언(正言).문학(文學)을 역임했고, 서북면체찰사 이원익(西北面體察使 李元翼)의 중사관으로 활약했다. 이어 교리(校理).응교(應敎)·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을 거쳐 선조38년(1605)내자시정(內資時正), 이후 광주목사(光州牧使)·봉산군수(鳳山郡守).상주목사(尙州牧使) 등을 역임하며 백성들의 구휼(救恤)에 힘썼다. 광해군(光海君)때 수찬(修撰). 장령(掌令).사인(舍人)을 거쳐 봉상시정(奉常侍正)으로 있다가 광해군9년(1617) 폐모론(廢母論)에 반대, 사직하고 고향으로 은퇴하여 이원익.정엽(李元翼.鄭燁)등과 교류했다.

 

뒤에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칭병(稱病)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20년(광해군 12) 통정대부에 올랐고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신도비(神道碑)는 장방형의 비좌(碑座)를 갖추었으며, 특히 는 쌍용(雙龍)이 어우러진 가운데 운문(雲文)이 중심부위 여러 곳에 정교하게 조각(彫刻)되어 있으며, 용비늘과 발의 표현은 사실적이다. 비는 전후면 각자(刻字)로서 앞면은 전자(篆字)로 증영의정이공신도비명(贈領義政李公神道碑銘)] 이라 횡서(橫書)했고, 비제(碑題)는 [유명조선국증영의정신도비명병서(有明朝鮮國贈領義政神道碑銘幷序)]라 음각되어 있다.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글을 짓고, 윤문학(尹文學)이 글씨를 허목(許穆)이 전(篆)을 맡았다. 문집에 <동고문집>이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진천송씨이며 묘소는 합부이다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 192 소재 신도비.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 간좌이다. 양평군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2년 양평군 용문면 조현리 산48의 13으로 이장하였다. 비문은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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