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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종대왕 백강공 가문의 독서관
날짜 2012-07-14 13:41:51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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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백강공 가문의 독서관

 

조선시대 대표적 명문가의 하나인, 세종대왕 후손 백강 이경여 선생 가문의 대대로 이어진 독서관은 크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이는 세월이 흘러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은 물론 후세의 자손들에게도 좋은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져 이에 아는 대로 간략히 정리하였다.

 

첫째, 聖人으로 가는 수련의 과정이었다.

 

백강 이경여 선생은 공자 맹자 등 성인을 본받아 독서를 통한 인격의 함양을 크게 강조하는 가훈을 후손들에 남기었다.

 

백강 이경여 선생은 큰아들 이민장 선생에게 `네 나이 열다섯인데 아직도 성인의 학문을 향한 立志를 이루지 못했으니 크게 반성해야 한다'고 하며, 시간은 덧없이 빨리 흐르고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청소년기에 성인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고 질책하였다. 백강공 스스로 틈이 나는대로 늘 독서하시는 분이었음에도 자기의 젊은 날의 게으름을 본받지 말라고 하였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훗날 백강 선생을 독서를 통하여 바른 인격과 행실을 세운 분으로 평하였다).

 

둘째, 부단한 노력이었다.

 

문과에 장원한 죽서 이민적 선생은 아들들에게는 지독한 독서를 시켰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뜀박질 운동을 하게하고 소화가 되기만 하면 책을 읽게 했다. 자신이 장원급제에 이어 큰아들 포암 이사명 선생의 장원급제, 손자 일암 이기지 선생의 장원급제는 우연이 아니라고 보겠다. 둘째 아들 소재 이이명 선생은 당대의 석학이 되었다.

 

셋째,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나 벼슬에는 크게 뜻을 두지 아니하고 선비의 바른 길을 먼저 택하는 것은 첨정공 이극강 선생, 동고 이수록 선생, 백강 이경여 선생 아니 그 이전부터 그러하였다. 동고공, 백강공 부자는 모두 광해군의 패륜에 벼슬길을 떠났다.

 

한포재 이건명 선생은 신임사화때 무고로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기 전 유언에서 '글을 열심히 읽어 마음과 인격을 닦되 과거와 출세에는 연연하지 말고 충효의 정신을 이어가라'고 자손들에 유언하였다.

 

병산 이관명 선생도 신임사화로 한때 노비로 전락하기까지도 하였고 부인에게도 신경을 써 주지 못한 것은 벼슬길에 나선 때문이라고 후회했다.

 

이병인 선생은 아예 과거를 보지 않고 독서를 하며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벼슬길은 필히 정쟁에 휘말리고 이는 자신의 삶에도, 가문에게도 누를 끼칠 수 있다는 현실을 바로 본 것이다. 그래도 이 가문에는 벼슬은 하지 않되 글은 게을리 읽어서는 안된다는 철학은 분명했다.

 

하지만 출사를 하면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는 밀성군, 운산군, 동고 이수록, 백강 이경여 선생부터 이 가문의 대표적 특징으로, 중종반정시에도 왕실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고, 광해군의 패륜이 자행되면서 모두 벼슬을 그만 두었으며, 신임사화의 충신, 노론사대신 중 두분 즉 소재 이이명 선생과 한포재 이 건명 선생의 모두 이 가문출생이다.

 

서하 이민서 선생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말하며 나라의 민주화와 백성의 삶 개선을 정치의 으뜸으로 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공경의 벼슬임에도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죽서 이민적 선생은 열 살 왕세자의 지나친 혼례추진에 대해 강하게 비판을 했고, 경연을 자주 거르는 현종임금에게 비판의 강도를 높이면서 한편으로 '運動'을 청하기도 하였다. 임금의 허약은 운동부족에서 온다는 말이었다.

 

암행어사로 나간 병산 이관명 선생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은 잠시 숙종을 분노케 했으나, 한 자리에서 3단계 특진이 되었다는 놀라운 야담을 낳게 되기까지 하였다. 병산 이관명 선생은 어전의 재판에서도 감성이 아닌 논리로 접근해야 해야 실체적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해 공감을 얻은 바 있다.

 

 

네째, 굶어도 책은 팔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의 대표적 문인화가인 능호관 이인상 선생의 아내는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경전서적들 만큼은 팔지 아니하고 지녔다. 이인상 선생이 시, 서, 화 모두에서 당대에 三絶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탁월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책을 목숨처럼 여기는 가풍 덕분이었다. 그의 작품은 오직 고상한 선비정신일 뿐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려움에 오늘날 대중적인 인기는 그의 탁월한 예술성에 비해 덜하다.

 

이렇게 책을 사랑하는 정신은 나의 외가 선조이신 광산김씨 사계가문의 서포 김만중 선생과 그 형님 서석 김만기 선생의 어머니 윤씨부인도 마찬가지 자세이었다. 유복자인 두 형제분은 모두 대제학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핵심은 백성사랑과 정의와 진리탐구의 정신이라 하겠다.

 

가장 중히 여긴 것은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과 정의와 진리의 정신을 바르게 지켜나간다는 것으로 보겠으며 독서는 그 주요한 인격연마의 수단이었다. 이는 세종대왕으로 부터 유래되어진 것으로 보며 이 정신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나라의 중요한 일들을 맡아온 이가문의 가장 큰 특징으로 생각한다.

 

백성사랑과 정의의 길을 찾음과 마음의 수양과 하늘을 섬기는 도리를 찾는 진리탐구의 정신은 백강 이경여 선생의 핵심사상으로 그의 상차문 등에 잘 나타나있다.

 

소재 이이명 선생은 당대의 실세 정치인이면서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천주교의 서적을 중국주재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입수하여 소개하였다. 당시로는 개혁적인 진리탐구 정신의 일환이다. 그의 백성사랑은 유배지 남해에서의 덕을 기린 “봉천사 묘정비”에 잘 나타나있다.

 

세종대왕의 과학정신을 이어받은 이민철 선생은 탁월한 천문학자로 혼천의(만원권 지폐 후면 사진)를 만들고 地動說을 입증하였다. 이 또한 백성을 사랑하는 진리탐구 정신의 일환이다.

 

국헌 이헌구 선생의 백성사랑은 지금 전북대 앞에 남아 있는 백성들의 선정추모비중 “구이익모(久而益慕) 날이 갈수록 더욱 그립다”라는 말에도 나타나 있다.

 

世宗大王은 "가전충효 세수인경 [家傳忠孝 世守仁敬] 충성되고 효도하고 어질고 공경하는 가풍(家風)을 대대로 지켜가라"라는 가훈을 남기었다.

 

2012. 7.14. 백강공 12대손 이주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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