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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문교육(漢文敎育)에 對한 提言
날짜 2012-09-12 13:24:42 작성자 이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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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교육(漢文敎育)에 對한 提言

 

우리들은 “한글”이라고 하는 세계에서 비길 바가 없는 과학적이고 유용한 글자를 가지고 있음으로 인하여, 특히 오늘과 같은 정보화시대에 이르러서는, 음양으로 엄청난 혜택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다.

 

한편, 우리들은 오늘날 세계화시대에 이르러 사실상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공용어로서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英語를 결코 등한히 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문화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漢文에 대하여도 결코 등한히 할 수가 없게 되어있다. 우리문화의 淵源도 알아 미래지향적으로 활용하여 나가야 하거니와 주변 동아시아국가들과의 교류에도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난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모든 정신문화적인 틀이 儒學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으로 하여, 한문의 교육도 자연히 유학의 교육과 같은 軌道로 이루어져 나갔던 것으로 보겠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더 이상 유학만의 틀 속에서 살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그리한다면 스스로 퇴보를 자초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 우리들의 한문교육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1. 《소녀경(素女經)》에도 ‘문리(文理)’는 있다

 

기자라는 지금의 직업이 그렇고, 더구나 그런 직업에서 지금 맡은 일이 그래서인지 일선 학교가 방학하는 즈음이면 대체로 이들 학생을 겨냥한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홍보하고자 하는 의뢰가 언론사로 잇따른다. 개중에는 한문 관련 강좌도 적지 않다. 한때는 고리타분함의 대명사처럼 지목되고, 그리하여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 해서 퇴출 위기에 처한 한문이 이런 대접을 받는 일을 나는 분명 고무(鼓舞)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들이 마련한 프로그램은 속내를 속속 들여다보면 아쉬운 구석 또한 적지 않다. 체통 문제가 있으므로 구체적인 사례는 적시(摘示)하지 않기로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다른 무엇보다 천편일률성을 지목할 수 있다. 무엇이 천편일률하다는 뜻인가? 프로그램 내용이 천편일률이요, 그들이 강독하고자 하는 이른바 강독 교재 또한 천편일률이다. 수강자의 수준에 따라 그런 강좌를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 따위로 나누는 일은 논외로 치자. 거기에는 분명 그럴 만한 곡절이 있고 그것이 때로는 합리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좌 속내를 들여다보면, 죽어라 공맹(孔孟)을 앵무새처럼 되뇔 뿐이다. 그리하여 그 강독 교재 목록을 보면, 공자와 맹자를 포기하면 마치 금방이라도 벼락이나 맞을 일인 듯이 《논어》와 《맹자》는 반드시 집어넣고, 그들 문도(門徒)의 소산(所産)으로 간주되는 《효경》과 《대학》과 《중용》을 지겹도록 반복할 뿐이다. 개중에 조금 선심을 쓴 듯한 곳에서는 《고문진보》와 《천자문》, 그리고 《동몽선습》과 《채근담》에 《노자》와 《장자》 혹은 《사기》〈열전〉, 간혹 《좌전》 강독 정도가 끼워 팔기 수준에서 들어갈 뿐이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가? 한국 한문학계에 여태 청산하지 못한 고질(痼疾)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모름지기 한문 공부는 사서오경(四書五經), 특히 사서에서 시작하거나 그것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다. 더불어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항용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이들 텍스트를 알아야 한문의 문리(文理)가 트인다고 한다는 것이다. 묻거니와 문리의 트임이 반드시 사서로 말미암아야 하는가? 반드시 공맹을 알아야만 문리가 서는가? 그러면서 또 자주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사서를 알아야 다른 한문 고전에 능통하게 되며, 이들은 인용이 잦으므로 반드시 마스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들 사서 외에도 이른바 교양이라는 측면에서 자양(滋養)이 될 만한 고전은 지천으로 깔렸으며, 비단 사서삼경이라야 한문의 문리가 트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한문 교육을 둘러싼 생각이 팽배한 바람에 어떤 현상이 빚어졌는가? 모름지기 《논어》라면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가 전부요, 《맹자》라면 ‘하필왈리(何必曰利)잇고’라는 말만 남을 뿐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들과 함께 이른바 기본교재로 거론하면서 강독을 ‘강권’하는 《대학》과 《중용》이 말은 쉬워 보여도 그것이 어디 이해하기가 쉬운 텍스트인가?

 

이들로 교육함으로써 무엇을 노리겠다는 것인가? 요즘 젊은이는 버르장머리도 없고 예의도 모르니 그것을 바로잡겠다며 2천 년 전, 아니 2천300년 전 맹자의 시대와 2천500년 전 공자의 시대로 하염없이 돌아가자는 말인가?

 

한문의 문리는 《소녀경》이나 《고금소총》으로 트일 수도 있다. 그 내용이나 사상에서도 이들이 결코 공맹이나 《좌전》에 견주어 더 천박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한문강좌라 하면 어찌하여 반드시 인의도덕으로 무장한 공맹을 장착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인다. 그렇다고 저런 강좌에 공맹을 빼야 한다는 말로 곡해하지는 부디 말았으면 한다. 공맹이어야 한다는 무언의 합의에 반기를 들고 싶을 뿐이다.

 

문리 얘기 나온 김에 공맹을 왼다 해서 그것이 저절로 틔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설혹 공맹을 줄줄이 입에 왼다 해서 십수 년 영어에 투자해서 외국인 앞에서 겨우 할 수 있는 말이 ‘how are you doing?’인 것과 견주어 더 낫다 자신할 수 있는 사람 몇 되지 않을 듯하다. 우리의 한문 교육과 강좌가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저와 같은 한문강좌도 이제는 수요자 중심으로 발상을 전환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비싼 시간 쪼개어 나오는 저들이 원하는 것이 어찌 ‘何必曰利’,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이겠는가? 그렇다고 흥미를 돋운다 해서 매양 전가(傳家)의 보물처럼 휘두르는 《사기》의 〈항우본기〉나 〈형가열전〉을 갖다 놓고는 '같이 읽자, 읽어보라, 비장감이 있지 아니한가'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보단 차라리 《소녀경》이나 《고금소총》이 낫지 않겠는가?

 

천편일률과 같은 교육방식, 천편일률과 같은 강독 교재에서 비롯하는 가장 우려스런 현상이 이런 강좌를 마련한 이들의 기대와는 전연 딴판의 결과를 내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훌륭한 공자를 내세웠음에도 그 첫 대목부터가 당장에 공부하라는 소리이니, 그리하여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가 ‘배우고 또한 익히면 어찌 열(熱)받지 아니하리오’라는 비아냥으로 발전하는가 하면, 그것도 부족한지 당장 《고문진보》 첫 대목 주자(朱子)의 권학문(勸學文)을 들이대고는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을 강요하니, 섬돌 오동나무는 잎이 피기도 전에 고사하고 만다. 요컨대 작금의 한문강좌가 한문을 격리하고야 마는 역설이 빚어지고 만다.

 

한문강좌와 그 교육 내용 또한 시대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이에 발맞춰 강좌 방식도 바뀌어야 하며 강독 교재 또한 혁파해야 한다. 21세기와 보조를 같이 해야지, 어찌하여 조선시대로 돌아가 그네들의 서당 교육방식을 이 시대에 끌어와서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내세우고 인의도덕을 설파하는가 하면, ‘책 속에 천금에 달하는 돈이 있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가뜩이나 싫다는 공부, 책읽기 한문강좌에서도 만나야 하겠는가?

 

문리는 많이 읽어 저절로 터득하기도 하겠지만, 그 시행착오를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고 해서도 아니 된다. 21세기 한국사회의 수준에 맞고, 한문을 소비하고자 하는 수요에 걸맞은 한문교재가 개발되어야 하며, 그에 따라 그 강좌 또한 바뀌어야 한다. 서점가를 돌며 뒤지다 보면, 그나마 쓸 만한 한문교재라곤 모조리 중국 아니면 일본의 번역본이요, 강독교재라 해 봐야 이미 그 목숨이 천년에 가까운 《고문진보》가 전부다.

 

이런 필요성을 언제까지나 《마법천자문》에 맡길 것인가?

 

21세기는 ‘何必曰利’를 요구하지 않는다. ‘강남 스타일’에 열광하며, ‘소녀시대’를 환호한다. ‘똥’이 자원이 되는 시대에 걸맞게 공맹을 들어낸 자리에 ‘똥의 미덕’을 노래한 ‘예덕선생’(穢德先生)이 정좌해야 하며, ‘야동’이 넘쳐나는 시대에 어쩌면 《소녀경》이나 《고금소총》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글쓴이 : 김태식(金台植) •연합뉴스 문화부 문화재 학술전문기자

2012. 8.29. 고전칼럼(한국고전번역원 고전포럼)에서

 

 

2. 우리 한문교육에 대한 提言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우리 자손들을 어떤 방향으로 교육하여가야 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한문교육을 한다고 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진리의 한 부분을 일깨우며 달리 해석 해가야 할 점들도 많다고 평가되는 儒學 등을 이 시대에 그대로 재주입하는 단순한 교육이 되어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말 것이다.

 

나의 사견으로는, 이 시대에 부응하며 또 우리 후손들이 참으로 복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역사상 가장 본받을 만한 세종대왕의 정신과 사상을 체계화하여 기본적으로 이어받고, 여기에 세계적으로 검증된 청교도 정신(Protestantism)을 같이 수용하여 시너지 효과가 나도록 우리의 기본 교육방향을 잡는 것이 우리들의 장래에 가장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한문교육은 이러한 교육의 방향에 따라 조화롭게 이루어 져야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한문 교육이 그들의 삶에서 그리고 사회발전에 정신적으로 그리고 실생활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배워서 활용이 되지 않을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큰 낭비이다.

 

다음으로는 한문교육의 교재가 배우는 어린이나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감각과 정서에 부합되고, 또 그들이 가급적 흥미가 있어 하는 내용으로 편성되어야할 것이다. 필요이상으로 고답적이고 주입하는 방식으로는 오히려 한문을 멀리하게 되는 역효과를 낼 수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소녀경(素女經)》에도 ‘문리(文理)’는 있다"는 위의 글은 사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나의 짧은 한문지식으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제안을 할 수 있는 입장은 못 되는 것이 매우 유감이다.

 

다만 우리선조님들의 작품들 또는 중국 등 외국의 좋은 글이나 시들 중에서 위의 관점에 부합되는 글들을 가려 체계적으로 교재를 편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며, 또 다른 나라들의 한문교육 동향을 부단히 연구해가며 반영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시집을 난이도, 주제 등에 따라 편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마치 서양의 고전음악이 오늘날 우리에게 크게 선호되어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서 心性순화(淳和)에 도움이 되는 좋은 詩 세편을 소개한다.

 

 

1)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봄날

 

중국의 詩聖 두보(杜甫)는 ‘곡강대주(曲江對酒)’라는 詩에서 아래와 같이 봄날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원외강두좌불귀(苑外江頭坐不歸) 수정춘전전비미(水精春殿轉菲微)

부용원 밖의 江어귀에 앉아 실의에 젖어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강너머 수정 같은 봄 궁전은 그 맑은 빛이 볼수록 눈앞에 아른거리네.

 

도화세축양화락(挑花細逐楊花落) 황조시겸백조비(黃鳥時兼白鳥飛)

게다가 복숭아꽃은 가늘게 버들가지를 쫓아서 떨어지고

꾀꼬리는 때때로 백조와 어울려 다정스레 나는구나

 

 

2) 雨後漫吟<우후만음> ~ 병산 이관명 선생

 

一犂春雨足。 내리는 봄비 밭갈이에 만족하고

繞屋草萋萋。 집 둘러싼 풀들은 무성하네.

拳土培新植。 한 줌의 땅엔 새 작물 심고

刈荊覓舊蹊。 잡풀들 베며 지름길 찾아가네

籠煙梅萼細。 자욱한 안개 속 매화꽃 부드럽고

浥露竹梢低。 대나무 끝가지엔 이슬 머금어

倚杖侯僮僕。 지팡이 의지하며 일꾼들 보살피니

門前日已西。 문앞엔 이미 해가 졌도다.

<屛山集卷之一에서>

 

봄비 내리고 난 후 바라보이는 들판의 정경들이 생동감에 넘치고 있다. 매화꽃, 대나무도 비에 젖어 싱싱하다. 해 지도록 밭갈이에 애를 쓰고 있는 일꾼들의 모습들을 바라보며 돌보고 있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는 자아의 내면적인 우수감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 漫吟 이란 마음 속 회포를 읊은 것을 말한다.

* 犂 밭갈 리.

* 萋萋 처처 : 우거진 모습.

* 刈荊 찰형 : 가시나무를 베다.

* 蹊: 지름길 혜

* 籠煙 농연 : 자욱한 안개.

* 萼 꽃받침 악

* 梢 나무끝 초.

* 侯 살필 후

 

 

3) 廣寒樓 에서 ~ 백강 이경여 선생

 

星河夜冷 廣寒樓 성하야냉 광한루

烏鵲橋橫 近斗牛 오작교횡 견두우

天上人間 分物色 천상인간 분물색

桂宮留得 月天秋 계궁유득 월천추

 

은하수 별빛 밝고 광한루 밤이차다

오작교 마주보며 견우 북두 가깝도다

천상과 인간은 물색으로 구분 된다는데

항아는 월궁에 천년을 머물었구나

 

달에 사는 선녀 항아는 본래 궁사 예의 아내로 미색이 뛰어났다고 전하는데, 그녀가 아직 월궁(달)에 머물고 있음을 읊고 있다. 남원 광한루 편액에 기록되어 있는 시이다.

 

낭만주의적 향취를 물씬 풍기는 시로, 마치 쇼팽의 야상곡(녹터언)을 듣는 듯하다. 남원 광한루에 가셔서 오작교를 바라보며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밝은 은하수 별빛아래 달에 사는 선녀를 의인화하여 그린 시이다.

 

차거운 밤하늘의 아름다움과 별들이 주는 신비스러움이 느껴진다.

 

천상과 인간을 구분하며 우리에게 사후에 이를 하늘나라 즉 來世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지옥에 이를 수도 있으니, 미리 미리 살피고 조심하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읽혀진다.

 

2012. 9. 12.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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