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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婦德의 전범(典範)~정경부인 윤씨 行狀
날짜 2013-06-17 11:32:08 작성자 이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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婦德의 전범(典範)~ 정경부인 윤씨 行狀

 

 

서포 김만중 선생이 지은 어머니 정경부인 윤씨 行狀을 아래에 소개한다.

 

서포선생은 부친이 정축노변란(丁丑虜變, 1637년. 병자호란)에 강도(江都,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윤씨부인의 가르침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제학이 되시고 나라에 중책을 맡으셨으나. 장희빈 일당의 못된 행태를 나무라고 탄핵하시다가 그만 남해 절도에 유배되어 꿋꿋한 선비 정신으로 그곳에서 지조를 지키시다가 일생을 마쳤는데, 이는 그의 사위인 소재 이이명 선생이 지은 시 “매부(梅賦)”시에 애절하게 그려져 있으며, 그 사연과 詩文이 오늘날 ‘남해유배문학관’에 조형물로 건축되어있다. 선생의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는 장희빈의 사악함을 풍자하여 당시 사회의 개선을 위해 지은 소설이다.

 

서포선생의 어머니 윤씨부인의 행적을 보면 오늘날에도 귀감이 될 점이 많은 부덕의 표상으로 조선의 대표적인 훌륭한 부인의 모습이라고 본다.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교육으로 자손들을 훌륭히 기른 백강 이경여 선생의 부인 정경부인 임씨 부인, 율곡 이이 선생의 어머니 신사임당 등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현모양처 상으로 생각되는데, 이 중 오늘날 특히 심사임당이 많이 회자되는 것은 심사임당은 스스로 시작품, 미술작품들을 남겨 오늘날의 현대 여성상과 부합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생이 지은 한글소설 ‘구운몽’은 이러한 모친 윤씨부인에 대한 지극한 효심으로 지어 드린 소설이다. 지극한 어머니의 정성과 유복자라는 특수 상황 등이 어우러져 지극한 효심을 낳은 것으로 본다.

 

" 태부인의 성은 윤씨니, 선계는 선산 해평이라, 고조의 휘는 두수(斗壽)이니 영의정 해원부원군이요, 시호는 문정공이다. 증조의 휘는 방(昉)이요, 영의정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니, 공덕 있는 어진 정승이 계승되었다 칭찬한다. 할아버지의 휘는 신지(新之)니, 선조의 따님 정혜옹주를 취처하여 해숭위(海崇尉)에 봉해졌고,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났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아버지의 휘는 지(?)니, 인조조 명신으로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정부인 남양홍씨니, 경기감사 휘 명원(命元)의 따님이다. 참판공은 다른 자녀가 없었으며, 정혜옹주는 다른 손자가 없고 오직 태부인 한 사람뿐이다. 때문에 옹주가 친히 안아 기르시고 입으로 외워 소학을 가르쳤다. 태부인은 총명하여 한번 가르쳐주면 문득 깨달으니 옹주는 항상 말하기를 '아깝다. 그 여자됨이여!' 했다.

 

자람에 미처 의복과 음식을 풍족하고 사치하지 못하게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빈한한 선비의 아내가 된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했다.

 

우리 아버지(충정공 김익겸 선생)에게 출가하자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의 시댁은 예법의 가문이니 부도에 어긋나서 나에게 수치스런 일을 끼침이 없게 하라' 했다. 그의 훈계함이 이와 같으므로 태부인이 출가할 때 나이 열네살인데도 시댁 가족에게 칭찬을 얻었다.

 

정축노변(丁丑虜變, 1637년)란에 선부군(김익겸 선생)이 강도(江都,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는데, 이때 태부인은 바야흐로 잉태하여 달이 찼는지라, 홍부인의 우소(寓所)인 포구에서 배를 얻어 화를 면하니 이때 선형(先兄. 서석 김만기 선생)은 겨우 다섯살이요, 불초는 태에서 떠나지도 않았었다. 난리가 안정되자 두 외로운 아이를 이끌고 본가의 부모슬하에 의탁하여 안으로 홍부인을 도와 가사를 보살피고, 밖으로 참판공을 봉양하는데 능히 뜻을 기르기를 옛 효자와 같이하고 한가하면 문득 서사를 펴 보아 스스로 즐기니 날로 조예가 깊어졌다. 이리하여 참판공은 거의 아들이 없는 슬픔을 잊었고 문목공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손녀와 더불어 말하면 가슴이 활짝 열리는 것 같으니 네가 만일 남자라면 어찌 우리 가문에 하나의 대제학이 아니리오' 했다.

 

우리 할아버지(허주 김반 선생. 사계 김장생 선생의 아들)의 장지를 회덕 정민리(현 대전 유성구 전민동)에 복장하고 선부군은 그 뒤에 부장하게 되었는데, 어느 지사가 말하기를 '그 장소가 후손에게 불리하다' 했다. 참판공은 의심하여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의 힘이 능히 개장 할만하니,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서울 국내로 이장하여 고아와 과부인 네가 절일(節日)때 성묘를 편리하게 하고저 하노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했다. 부인이 대답하기를 '풍수의 말이 본래 망매하여 믿기 어렵고 선영 국내에 장사 지내면 신도가 편안할 줄로 생각되며, 또한 호중(湖中, 충청도)에는 시댁 가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만큼 아이가 장성하기 전에는 그들에게 수호를 의로할 것이니 이장을 원치 않습니다' 했다.

 

참판공이 세상을 버리자 홍부인은 애통과 신병으로 일을 보살피지 못하고 또한 자제들의 가사를 간검하는 이도 없었다. 태부인이 홀로 수 명의 여종과 더불어 상수를 장만하되 의금(衣衾)과 제전을 정결하고 풍결하게 하여 예절에 맞지 않은 것이 없으니 보는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겼고 그 후 어머니 상에도 또한 그와 같이 했다.

 

이후부터 가사가 더욱 곤란하여 심지어는 몸소 길삼하여 조석을 이어가는 지경에 이르되 항상 태연하여 근심과 번뢰하는 용모가 없었다. 또한 불초 형제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다.대개 이와 같이 하신 것은 어릴 때 부터 집안 일에 골몰하여 서책 공부에 방해될까 염려한 것이다.

 

불초 형제가 어려서 배울 때 밖의 스승이 없었고 소학, 사략, 당시(唐詩) 등은 태부인이 가르치시니 자애는 특이 했으나 공부의 과정은 지극히 엄격했다. 항상 말씀하시를 '너희들은 다른 사람과는 같지 않으니 남보다 한층 더해야 겨우 남의 유(類)에 들리라' 하시고 '사람들은 행실이 없는 자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반드시 과부의 자식이라 하나니 이 말을 너희들은 마땅히 각골하라' 했다. 불초 형제가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손수 매를 잡고 울면서 말씀하시를 '너희 아버지가 너의 형제로서 나에게 부탁하고 세상을 버렸으니, 네가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너의 아버지를 지하에서 보겠는가, 학문을 아니하고 살려면 빨리 죽는 이만 같지 못하다' 하셨다.

 

그 말씀의 애통 박절함이 이와 같으므로 선형(先兄)의 문장이 비록 천품적이긴 하나 그 공부가 일찍 성취된 것은 태부인의 격려한 힘이 많았고, 만중(萬重)은 어둡고 미련하여 스스로 포기할 정도이지만, 가르침이 지극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난리가 지난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서적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맹자, 중용 같은 모든 책을 태부인이 곡식으로 구입하고 좌전(左傳)을 팔으려하는 자가 있으니, 선형이 마음으로 심히 애중히 여겼으나 권 수가 많으므로 값을 감히 묻지 못했다. 태부인은 곧 베틀에 있는 명주를 베어 그 값을 갚으니 이후로는 아무런 저축이 없었다. 이웃 사람 중 옥당의 아전이 된 자에게 부탁하여 홍문관 내의 사서와 시경, 언해를 빌려 모두 손수 등초했는데 자획이 정교하고 섬세함이 구슬을 끼운 것과 같아서 한 획도 방필함이 없었다.

 

참판공께서 말년에 서자를 두고 세상을 버린 후에 종질로써 계후 어머니처럼 섬겨서 늙기에 이르도록 사람들은 간격의 말이 없었다. 그들과 살림을 나누매 전토(田土)의 천박하고 노비의 늙고 가난한 자를 선택하여 말하기를 '내가 청렴한 이름을 위함이 아니라 이것이 나의 하고자 하는 바이다' 했다.

 

서제가 죽으매 또 그의 고아를 데려다가 모든 손자와 더불어 같이 배우게 하니 이때 태부인의 나이 이미 늙어 오육십이 되었는데도 손자를 수 명이나 가르치니 대개 이를 즐거워함으로 피로함을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성이 글을 좋아하여 늙어서도 폐지하지 아니 하시고 더욱 역대 치란과 명신의 언행 보기를 즐겨하여 이따금 자손에게 가르쳐주고 음영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부녀를 가르치매 길삼, 음식, 차사, 향사에 넘지 않았고 일에 임함에 더욱 경건하여 이미 가사를 인계 했음에도 오히려 몸소 그릇을 씻고 반찬을 만들어서 심한 질병과 피곤함이 아니면 남에게 대리로 시키지 않았다. 스스로 미망인이라 일컫고 종신토록 몸에 빛난 의복을 가까이 아니하시고 연회에 참여치 아니하며 음악을 듣지 않았다. 선형이 이미 영귀하자 수연을 베풀 것은 간청 하였으나 마침내 허락치 않고 오직 자손의 과거 급제 경사에만 잔치와 음악을 허락하면서 말씀하시기를'이는 진실로 문호(門戶)의 경사요, 내 한 몸의 사사로운 기쁨이 아니라' 했다.

 

계사(癸巳, 1653년)에 비로소 선형이 과거에 급제하여 비로소 국록의 봉양함을 얻게되고 만중이 또한 을사(乙巳, 1665년)에 과거에 급제했다. 정미(丁未, 1667년)에 선형이 이품직(二品職)을 받게되자, 태부인이 정부인에 봉해지고 갑인(甲寅, 1674년)에 인경왕후가 숙종의 비가 되자 선형은 부원군에 봉해지고 태부인도 또한 정경부인에 승진되었다.

 

인경왕후가 어릴 때 태부인의 품에서 자라는데 반드시 바름으로써 가르치시니 나이 십일세에 세자빈에 간택에 응하게 되었는데 주선에 응답하기를 성인과 같이하니 궁중 사람들 모두가 기뻐하고 탄복하였다. 이 후로 선형은 매양 가문에 성만함을 염려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으로 하여금 이 정도에 이르게 한 것은 모친의 힘이다' 했다. 태부인은 이따금 왕비를 보게 되면 문득 경계하되 옛 어진 왕비의 일을 일컫고 일호도 사적인 혜택에는 언급하지 않으니 인선(효종의 비 장씨), 명성(현종의 비 김씨) 두 국모는 공경하고 존중히 여겼다.

 

경신년(1680년)에 인경왕후가 승하하자 평소에 사용하던 의복과 기물을 왕자와 공주에게 넘겨줄 곳이 없었다. 명성왕후는 궁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차마 물건을 보지 못하겠다. 이제 본가에게 주고자 하노니 나의 뜻 전달하라' 하니 태부인이 대답하기를 '인경왕비께서 비록 불행하여 아들이 없으나 일후에 국가에서 자손의 경사가 있으시면 이 또한 인경왕후의 자손이니 저장하여 기다림이 옳을 뿐만 아니라 궁중에서 사용하던 좋은 물건을 어찌 감히 사가에 둘 수 있겠습니까' 하니 궁인이 복명하자 명성왕후는 크게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본가의 훌륭함이 이렇게 처리할 줄 짐작했다.' 하고 주상은 이 말을 들으시고 또한 말하기를 '이는 사군자의 행실이로다' 했다.

 

정묘년(1687년) 봄에 선형이 어머니의 슬하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는데 태부인의 나이는 칠십이 넘었다. 자손들은 차마 최복을 드리지 못했다. 태부인이 묻기를 '어이하여 상복을 만들지 아니 하느냐' 했다. 대답하기를 '우리나라 풍속에 부녀자들은 오직 삼년상에 최복을 갖추고 기복이하는 다만 의대로써 성복하는데 이 또한 기년복에 해당되므로 최복을 만들지 않은 것 입니다.' 했다. 태부인이 말씀하시기를 '장자의 복을 어찌 다른 기년복에 비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예문과 같이 성복했다. 불초는 태부인이 상축에 계시면서 조석으로 애읍하여 병환이 되실까봐 염려되어 내 집으로 모시고자 했다. 태부인이 울면서 말씀하시기를 ' 내 비록 늙고 병들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조석으로 곡성을 들으면 내가 참제함과 같은 생각이 드는데 만약 너의 집에 간다면 어떻게 마음을 진정하겠는가 또한 여러 손자를 보면 그 아비를 보는 것과 같은데, 만일 너희 집에 가면 저 손자들이 어떻게 나를 자주 와서 보겠는가' 하고 여러번 간청해도 이에 따르지 않았으니 비록 비애중에 있으면서도 예문을 돈독 하심이 이와 같았다.

 

그 해 가을에 불초가 국사를 말 하다가 서새(西塞)로 귀향가게 되었다. 태부인은 성 밖에서 전송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영해(嶺海)의 행차는 옛사람도 면하지 못한 바이니 그 곳에 가거든 자신 스스로를 사랑하고 나의 염려는 하지 말라' 하였다.

 

이듬해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 석방의 은혜를 입고 돌아와 모시게 되었는데 수 개월도 안되어 기사사화가 일어났다. 곧 사형에서 감면되어 남해로 위리안치되고 손자 세사람이 잇달아 절도로 귀향가게 되었다.

 

태부인이 평소에 천촉 병환이 있어 추운 계절을 당하면 문득 재발하였다. 선형의 상을 당함으로부터 연 이어 근심과 슬픔을 당하자 본병이 가첨되어 이해 겨울 병환이 위독한데도 오히려 손자와 증손에게 훈계하기를 '가정의 환란으로써 위축되지 말고 쓸데없다하여 학업을 폐피 말라' 했다. 조석상에 조금만 색다른 만찬이 있으면 문득 기뻐하지 않으며 말씀하시기를 '우리집 음식이 본래 이와 같이 않았다' 했다.

 

돌아가시기 수 일 전만 해도 순순하게 근검으로써 자부, 손부를 경계하시고 이 밖에는 오직 아들과 세 손자가 장향에 있는 것을 말씀하시고 다른 자손은 염려하는 바가 없었다.

 

아! 슬프도다. 처음에 선형이 태부인이 연로하심으로써 미리 수의 마련하여 하자 태부인이 이 사실을 아시고 이르기를 '정축년(1637년) 너의 아버지 상사에 재물이 없어 예절을 갖추지도 못한 점이 많은데 이제 나에게 그 보다 더 잘할 수 있겠는가' 했다. 선형이 대답하기를 '전후의 가정 형편이 같지 않습니다' 하니 태부인이 말씀하시기를 '내 또한 이를 어찌 모르오. 다만 광중에 장사 지내면서 후박(厚薄)이 서로 다르다면 내 마음이 어찌 능히 편안하겠느냐' 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제손들이 받들어 염송 함에 홍자(紅紫)와 화채를 쓰지 아니함은 남긴 뜻을 참작한 것이다. 태부인이 만력 정사년(1617년) 9월 15일에 태어나서 기사년(1689년) 12월 22일에 마치시니 향년이 칠십삼이다. 손남(孫男) 진화(鎭華)와 증손 춘택 등이 영구를 받들어 선부군 묘에 합장하니 경오년(1690년) 2월 21일 이었다.

 

태부인이 성품이 인자하고 용서함이 많아서 자손을 어루만지고 비복을 부림에 항상 은혜와 사랑에 과 하면서도 단아하고 방정하여 준엄 개결하여 명랑하게 장부의 풍도가 있었다.

 

선형이 일찍 경기 고을의 원이 되어 녹봉이 적어 봉양이 부족함으로써 한탄하되 태부인이 말씀하시기를 '다행히 국은을 입어 따뜻한 온돌방에서 배불리 먹는데 이것이 부족하다면 어디서 만족을 취하겠는가. 네가 능히 직책에 마음을 다 한다면 이 봉양이 이보다 더 두텁겠느냐'했다.

 

손자 진구가 감사가 되었을 때 관할 내의 수령이 태부인의 생일에 옛 규례에 의거하여 폐백을 보내왔는데 사람은 진실로 통가(通家)의 자제였다.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의리에 가히 사양할 수 없다' 했으나 마침내 받지 아니하였다. 말세에 교묘한 사기로 아전과 시정배들이 오로지 청탁을 일삼으니 임관한 존속 부녀들이 더욱 뇌물을 보내는 행위가 있었다.

 

불초 형제가 벼슬하여 나간 이후로 혹 간단한 편지도 어머니 눈 앞에서 온 일이 없었으니 이로써 가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 화액곤궁에 처해도 민망하게 여기지 않고 영귀에 임해도 교만하지 않았으며, 참혹한 화를 만나면 사람으로 감내하지 못할 일이로되 의리에 운명에 편안하여 흔들리지 않고 위축되지 않았으니 이는 남보다 지나친 천품만이 아니라 서책을 박람하고 옛일을 상고한 힘은 속일 수 없는 일이다. 이럼으로써 친척과 이웃에선 보기를 엄한 스승과 같이 여겨 모두 모범으로 삼게 되었다. 그의 발언과 처사가 의리에 합하여 궁중의 풍화를 돕고 영광스럽게 임금의 표창을 받았으니 이는 또한 근대의 규문에서 듣기 드문 일이다. 옛날에 이른바 '여자로서 선비의 행실을 지녔다'는 말에 우리 태부인은 진실로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로다.

 

옛글에 이르되 '적선한 집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 하고 서전에 이르되 '가득하면 해로움을 부르고 겸손하면 유익함을 받는다' 하였으니 우리 태부인 같으신 분은 선을 쌓고 보탬을 받는 도에 적합하지 않음이 없는데 정축년에 남편 상을 당하므로서 많은 어려움과 그로 인한 근심이 곤란하고 박약할 때 보다 더 심하여 얼마 안되어 인경왕후가 승하하셨고, 우리 선(先) 백씨의 효성으로써 능히 봉양을 마치지 못하고 수년사에 세태가 크게 변하여 자손이 나뉘고 흩어져서 세상에서 슬피 여기는 바가 되었으니 이는 사람으로서 보답하는 하늘의 이치가 의심이 없을 수 없다. 비록 그렇치만 세상에서 선과 복을 향유하여 한 평생을 부귀로 즐겁게 지내면서도 죽는 날에는 남들로 하여금 칭찬할 만한 사실이 없다면 이는 진실로 태부인께서 부끄럽게 여긴 바이다.

 

태부인이 이(二)남을 낳으시니 맏 아들 선형 만기니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으로써 일찍이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다.선형의 직급이 높고 현달하되 태부인이 일찍이 기쁜 기색이 없더니 대제학이 됨에 이에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 한 부인으로 너희 형제를 가르치며 항상 두려워 하기를 너희들이 고루하고 배움이 없어 선인께 수치와 모욕이 될까했더니 이제서야 거의 모면 되었다.' 하였다.

 

막내는 불초 만중이다. 선형은 군수 한유향의 딸을 취하여 4남 3녀를 낳으니 맏이 진구요, 다음은 진규이니 모두가 문과 급제하고 다음은 진서, 진부이니 모두 성관하지 않았다. 인경왕후는 자매에서 맏이요, 다음은 정형진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이주신에게 출가했다.만중은 판서 이은상의 딸은 취처하여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인 진화는 진사요, 딸은 문과 급제한 이이명에게 출가했다. 진구의 아들은 춘택, 보택, 운택이요, 나머지는 다 어리다. 진화의 아들은 다 어리고, 정형진 이이명의 소생도 다 어리다.

 

만중이 태어나기 전부터 죄가 많아 평생에 아버지의 안면을 보지 못하고 난리 때 태어나느라 어머니의 노고가 보통 사람보다 백배나 되었는데 우둔하여 아무런 지식이 없고 은혜와 사랑에 친압하여 안색을 순수하기에 어긋남이 많았다.

 

분수에 맞지 않는 영귀가 어버이를 영화롭게 함이 아닌데 참광하고 우매하여 함정을 밟음으로서 우리 태부인에게 평생의 슬픔을 끼쳐 드렸으니 불효의 죄는 하늘에 관통하는데 오히려 목을 찌르거나 배를 갈라서 귀신에게 사죄하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독기 어린 바닷가 가시울 속에서 삶을 구하니 아! 슬프도다. 돌이켜 생각하건데, 하늘의 이치가 정상에 돌아오지 않고 남은 목숨이 떨어지게 되었는데 진실로 두렵거늘 우리 태부인의 좋은 말씀과 훌륭한 행실이 점차 암매하여 후손에게 모범을 드리울 수 없으므로 감히 슬픔을 억제하며 아픔을 참고 본래 손수 언행의 일통을 기록하여 몇 장을 등초해서 여러 조카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성품이 본래 어둡고 막혀 언행을 잘 보지 못하고 더구나 정신이 소모되어 십분의 일 만을 기록하게 되니 불초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큰 것이다.

 

생각의 기억으로는 태부인께서 일찍이 근대의 비문과 묘지를 보다가 부덕(婦德)의 칭찬이 태과(太過)한 것을 병들게 여기면서 말씀 하시기를 '규문 내의 행검을 남으로서 알바가 아닌데 병필(秉筆)가들이 다만 가장(家將)만을 빙자함으로 그 말 자체가 증거의 자료가 못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찌 우리나라의 현부인이 이처럼 많겠느냐.' 하셨다. 이 말씀이 낭랑하게 귀에 남아 있음으로 이제 덕행을 칭술하는 문자에서 감히 한 글자도 꾸며 만들지 못하고 차라리 간략히 하는 것은 대개 우리 태부인의 평소의 뜻에 따르자는 것이다.

 

경오년(1690년) 팔월 일 불초 고 애 남 만중은 피눈물을 닦으면서 삼가 행장을 짓노라 "

 

정경부인 윤씨가 이렇듯 일생을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선조들의 모범과 가르침에 아울러, 평소에 고전들을 섭렵하고 상고하여 마음과 몸을 단련하여 간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겠다.

 

하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윤씨부인이 살던 시대의 고전이외에도 참으로 동서양의 훌륭한 모범과 고전들이 많아 더욱 세상과 인생의 본질을 더 잘 꿰뚫어 볼 수 있는 시대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더욱 天理에 합당하게 보람과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가야하는 이유이다.

 

위의 행장에서 나에게 특히 주목되는 바는 "옛글에 이르되 '적선한 집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 하고 서전에 이르되 '가득하면 해로움을 부르고 겸손하면 유익함을 받는다' 하였으니" 라는 대목이다.

 

특히 겸손의 美德이야말로 德중의 德으로 여겨진다. 모든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더 가치가 있는 데가 있는 귀한 존재로 가장 중히 인식하는 태도야말로, 우리들이 사랑중의 사랑인 '아가페(agape)의 사랑'을 잉태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면서 겸손과 아가페사랑의 모범을 몸소 보여주었다.

 

또한 서포 선생은 나의 외선조가 되시므로, 저의 어머니와 그 형제분들에게서도 윤씨부인의 모습이 일부 전해 내려와 살아 있었음을 느낀 바가 있어 더욱 감회가 새로우며, 이런 모습들이 이 시대와 후손들의 시대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더욱 계승 발전 시켜 나아가야 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2013. 6.17.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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