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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강 이경여 선생 신도비명
날짜 2009-06-23 15:24:41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2604
첨부파일 백강신도비명국역 국조인물고.docx    

아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글로 보는이에게 귀감이 될 것으로 생각되어 게제합니다.(세종대왕 왕자 담양군 자손 이강석씨가 보여준 번역인데 검토하시어 오역이 있는지도 보시기 바람니다)  감사합니다.

백강 이경여 신도비명___우암 송시열 

글쓴이: 이강석 --- 송자대전 ( 송시열문집 )에 실린 글임 .

우리나라 학자중 유일하게 자가 붙여진 인물이 송시열이다


효종조 영의정 백강 이 경여는 세종왕자 밀성군 이 침의 6 대손이다.밀성군은 계양군의 친아우요 담양군의 친형이다.


밀성군 가문은 전주이씨중 가장 번창함은 물론 조선시대에  최고의 명문가를 이루었다.

 신도비명(神道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57권     

碑銘) 

백강 (白江) 이공(李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을유년(1645, 인조23)에 상(上)이 이르기를,


“세자(世子)가 죽고 그의 아들이 어리니, 내가 장차 현능(賢能)하고도 장성(長成)한 사람을 세자로 선택하겠다.”


하자, 군신(群臣)이 모두 ‘전교(傳敎)가 지당하십니다.’ 하였으나, 영의정(領議政)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이공(李公)만은 홀로 그것이 불가(不可)하다는 의사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미 어린 아들의 어머니(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인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가 죄(罪)를 입어 죽게 되자 공(公)이 또한 역쟁(力爭)하니, 상이 전사(前事)를 가지고 공(公)을 남방(南方 진도(珍島)를 말함)에 귀양 보냈다가 다시 북쪽 아주 궁벽한 먼 곳(삼수(三水)를 말함)으로 이배(移配)시켰다.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 드디어 차적(次適 다음의 적자(適子)라는 뜻)으로 왕위(王位)에 오르자 즉시 공(公)을 특사(特赦)하고, 공이 풀려 돌아온 지 두어 달도 못 되어 상공(相公)에 복직시켰다.


공은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중대한 명(命)을 받아 매양 정심(正心)ㆍ성의(誠意)의 설(說)로 임금 앞에 진주(陳奏)하여 백성들과 화합(和合)하고 천명(天命)을 기도하는 근본으로 삼으니, 온 사방(四方)이 다 같이 공(公)에게 국운(國運)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공은 곧 졸(卒)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이르기를,


“성인(聖人) 임금에 현인(賢人) 신하가 있기로는 삼고(三古 고대(古代)를 셋으로 나눈 상고(上古)ㆍ중고(中古)ㆍ하고(下古)) 이래로 드문 일이다.”하였다.


공의 휘(諱)는 경여(敬輿), 자(字)는 직부(直夫)인데,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의 7대손(孫)이다. 세종대왕의 별자(別子 서자(庶子))인 밀성군(密城君) 휘(諱) 침(琛)으로부터 3세(世)를 지나 왕실(王室)과의 친속(親屬) 관계가 조금 소원(疏遠)해진 때에 미쳐 비로소 드러난 이가 있었으니, 이가 곧 첨정(僉正) 극강(克綱)인데, 공(公)의 아버지인 목사(牧使) 수록(綏祿)이 바로 그의 아들이다. 목사공(牧使公)은 훌륭한 행실과 아름다운 덕이 있어 사대부(士大夫)들이 지금까지 그를 칭송한다. 공은 막 나서부터 특이한 자질(姿質)이 있어 15세 되었을 때에 황조(皇朝 명(明) 나라)의 동 낭중(董郞中)이 공을 만나 보고서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비록 상국(上國 중국)에서 났다 할지라도 반드시 세상에 높이 이름을 떨칠 사람이다.”하였다.


17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25세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한림(翰林)으로서 권신(權臣)의 자식을 천거(薦擧)하지 않고 장공 유(張公維)를 천거하여 자신의 직책을 대신하게 했다. 공과 장공이 소인(小人)들로부터 참소를 받게 되자, 공은 스스로 인책하고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요청하여 이천 현감(利川縣監)을 거쳐 충원 현감(忠原縣監)으로 옮겼는데, 그때 부역(賦役)이 매우 번거로웠으나 공이 규획(規畫)을 잘 짜서 방도가 있게 함으로써 백성에게 미친 혜택이 많았다. 그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이어 외간(外艱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다.


계해년(1623, 광해군15)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즉위(卽位)하였는데, 이에 앞서 이이첨(李爾瞻) 등이 비록 공을 미워하였으나 또한 인품(人品)과 문벌(門閥)로 말미암아 항상 청요직(淸要職)에 있었는데, 공이 문득 사퇴(辭退)하고 갔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맨 먼저 공을 수찬(修撰)으로 부르자, 공은 매양 상(上)께 왕도(王道)로 마음을 가질 것을 청하니, 당시에 관상(管商)의 설(說)을 숭상하는 자들이 기세(氣勢)를 펴지 못하였다. 이때 원악(元惡 원흉(元凶)과 같은 뜻으로 여기서는 이이첨)은 이미 복주(伏誅)되었는데, 공은 간직(諫職)에 있으면서 그의 당류(黨類)까지 구태여 근절시킬 필요는 없다고 말하여 관대(寬大)한 전법(典法)을 보이게 하였다.


부모가 늙었다는 이유로 지방 수령(守令)으로 나가기를 청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않고 특별히 쌀과 콩을 하사하였다. 이해 겨울에 이조(吏曹) 낭관(朗官)에 옮겨졌으나, 공은 남달리 청정(淸正)하여 시비 선악을 분명히 처결함으로써 요행의 문(門)을 스스로 막았다.


다음해에는 난(亂 1624년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하여 남쪽으로 내려가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이어 겸문학(兼文學)이 되어 세자(世子)를 시강(侍講)하였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사명(使命)을 받들어 서남(西南) 지방에 갔다가 돌아와서, 서수(西帥)를 갈아야 한다는 장문(狀文)을 올렸으나 조정(朝廷)에서 들어주지 않았다가 뒤에 과연 실패하였다. 응교(應敎)ㆍ전한(典翰)을 거쳐 사간(司諫)이 되었는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문정공(文正公)이, 기회를 엿보아 수완(手腕)을 휘두르는 조정의 대관(大官)들을 논박(論駁)하다가 상(上)의 뜻에 거슬려 파면된 일과 또 상이 사친(私親)의 상(喪)을 당하여 중궁(中宮)의 예(禮)을 쓰려는 데 대해 공(公)이 변론하여 매우 강력하게 저지(阻止)하다가 드디어 파면되고 말았다.


다시 서용(敍用)되어 시정(寺正)이 되고, 조사(詔使 중국 사신)가 왔을 때 그의 연접사(延接使)가 되었으며, 도청(都廳)에서 폐조(廢朝 광해조(光海朝))의 《실록(實錄)》을 수찬(修撰)하는 데 참여했다. 다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다음, 호패(號牌)를 차고 명(命)을 받들어 호남(湖南) 지방에 찰거(察擧 재인의 현부(賢否)를 살펴 거용(擧用)함)하러 나갔다가, 노변(虜變 1627년에 일어난 후금(後金)의 침략, 곧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있다는 말을 듣고 호남으로부터 즉시 행재소(行在所 인조가 피란했던 강화(江華))에 가서 집의(執義)에 제수되고 이어 승지(承旨)에 올랐으며, 곧 다시 충청도 감사(忠淸道監司)가 되었다. 공은 교만하고 방자한 훈귀(勳貴)들을 내쫓는 데 있어 무릇 큰 이해(利害)가 달려 있을 경우에는 조정(朝廷)에 극력 주청하여 반드시 내쫓고야 말았다. 다시 들어와서 대사성(大司成)ㆍ이조 참의(吏曹參議)ㆍ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때에 공이 부여(扶餘)에 복거(卜居)해 있으면서 여러 번 소명(召命)을 사양하고 부모 봉양할 일을 위해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었는데, 관리(官吏)들은 공을 무서워하고 백성들은 공을 사랑하여 명령하지 않아도 모두가 일에 잘 따라 주었다. 공은 매양 공무(公務)를 마친 여가에는 흥취(興趣)를 가져서 속세(俗世)를 벗어나는 고상한 생각이 있었다.


다시 들어와서 부제학이 되어 차자(箚子)로 조목별로 진계(陳啓)하여, 학문에 진취하고 궁중(宮中)을 잘 어거할 일로 근본을 삼게 하니, 상이 이를 가상히 여겨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어버이의 병환(病患)으로 인하여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면직(免職)시켜 줄 것을 간절히 바랐으나 윤허하지 않고, 마침내 승지(承旨)로 부르자 조정에 들어가서, 글 읽은 사람이 항상 경악(經幄 경연(經筵))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논하고, 다시 부제학(副提學)에 제수되었다.


인목대비(仁穆大妃)가 훙(薨)하였을 때 빈전(殯殿)에 조알의(朝謁儀)를 정지한 데 대해 공이 차자를 올려 시정함으로써 이로부터 그대로 법령(法令)이 되어 버렸다. 상(上)이 또 친히 무고옥(巫蠱獄)을 다스렸는데 옥사(獄辭)가 자못 빈전(殯殿)에게까지 침범하자 공이 정성을 다하여 보호(保護)함으로써 상이 느껴 깨달아서 효도를 다하게 되었다.

공이 귀성(歸省)을 마치고 오자 조정에서 공에게 전라도 감사(全羅道監司)를 제수하고 겸하여 편의할 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하니, 공이 이(利)와 병폐(病弊)에 관한 열 가지 일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올렸는데, 정치를 하는 데 있어 하나같이 지방의 호족(豪族)들을 억누르고 가난한 백성들을 붙들어 주는 일을 급선무로 삼았다.


갑술년(1634, 인조12)에 정전(正殿)에 뇌진(雷震)이 있자, 공이 이때 조정에 돌아와서 옥당(玉堂)의 장(長)이 되었는데 매우 간절히 진계(進戒)하였다. 이듬해인 을해년에 인열왕후(仁烈王后 인조의 비(妃))가 승하(昇遐)하자 공이 부여(扶餘)로부터 올라와서 소(疏)를 올려, 상이 기년복(朞年服)을 입지 않고 주상(主喪 죽은 이의 제전(祭奠)을 주장하여 맡아보는 것)을 하지 않는 것과 세자(世子)가 진현(進見)할 때 반길복(半吉服 평복(平服)에 가까운 옷)을 입는 것은 모두 예(禮)가 아니라고 논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노(虜 후금(後金), 즉 청(淸) 나라)와의 불화(不和)의 단서가 열리자 공이 매우 분발(奮發)한 말을 진계하고, 또 아뢰기를,


“성상(聖上)께서 이미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저들[彼 청 나라]을 배척하시어 대의를 지향하는 소리가 이미 드러났는데, 도리어 국가의 체통을 떨어뜨리고 애걸복걸 화친하기를 요청한단 말입니까. 차라리 나라가 멸망할지언정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해 겨울에 노(虜)가 과연 대거 침입해 오자, 공이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여름에는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에 제수되어 광주(廣州)의 형세가 관방(關防)이 될 만함을 진작 보아 두었다가, 돌아와서는 여기에 성(城)을 쌓아서 위급한 때에 대비하기를 청하였다.

이후로는 항상 논사(論思)의 직책에 있으면서 정공 엽(鄭公曄)의 고사(故事)에 따라 대사성(大司成)을 겸임하였고, 이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어버이를 위하여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나가게 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대부인(大夫人)이 별세(別世)하므로 상(喪)을 마치고 나자 상(上)이 공을 등용하기 위해 부르기를 더욱 마지않았다.

노인(虜人)이 어떤 사건(事件)으로 인하여 이계(李烓)를 잡아다가 신문하자 이계는 제가 죽는 것을 면하기 위해, 공은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노(虜)의 연호(年號)도 쓰지 않으며, 그의 뜻은 항상 남조(南朝 명(明) 나라)에 있다고 밀고(密告)함으로써 노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공(公)을 잡아가지고 돌아갔다. 그러나 공은 태연히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모두가 운명이다.”

하였다. 그후 여러 달 만에 조정에서 벌전(罰錢)을 바침으로써 공이 마침내 돌아오게 되었다. 공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이때 나라의 풍속이 점점 오랑캐의 풍습에 전염되어 가므로 공이 법제를 확립하고 기강(紀綱)을 바로잡되 더욱이 잃어버린 기강을 바로잡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자 이때 상이 오랫동안 병환이 있었던 터라 요인(妖人)의 말을 받아들여 그의 사술(邪術)을 쓰려 하므로, 공이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명(命)을 세우고 이치를 밝히며 정도를 지켜서 사(邪)를 멀리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상이 곧 그날로 요인에게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이윽고 공이 사명(使命)을 받들어 노중(虜中)에 갔는데, 노가 전일의 원한을 가지고 부사(副使)로 하여금 사명을 필(畢)하게 하고는 이내 공을 구금하였다. 뒤에 노인이 전후(前後)로 구금했던 몇 사람을 모두 석방하여 저들의 만족한 뜻을 보임으로써 공이 마침내 청음공(淸陰公)과 함께 세자(世子)를 따라 본국(本國)으로 돌아왔으나 세자는 세상을 떠났다. 효종(孝宗)이 즉위(卽位)한 처음에 해괴한 기미가 은밀히 일어나고 유언 비어(流言蜚語)가 발생하였으나, 공이 수상(首相)으로서 종용(從容)히 처리하여 끝내 무사하게 되었다.

공은 일찍이 노인에게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노인이 본디 좋아하지 않았는데, 노인이 일찍이 임사신(任使臣 사명을 맡은 신하)을 파면(罷免)하자, 공이 말하기를,


“적인(敵人)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사람의 금종(擒縱 사로잡았다가 다시 놓아주곤 하는 일)을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감히 힐난하지 못하니, 어찌 나라의 체통이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변사(辨使)를 보내어 맞서 따지니, 노인이 노(怒)하여 말하기를,


“이를 주장하는 자가 누구냐?”

하고는 드디어 공(公)까지 아울러 금고(禁錮)시켰다. 그러자 상이 공을 소견(召見)하고 눈물을 흘렸다. 공은 비록 자리를 떠나 있었지만 반드시 일에 따라 상께 납약(納約 납약자유(納約自牖)의 준말로 상대방이 알기 쉬운 것부터 설명하여 깨닫도록 인도함)하니 더욱 공을 믿고 의지하였다. 일찍이 노중(虜中)에 다시 공에 대한 번잡한 말들이 나돈다 하여 향리(鄕里)에 피해가 있었는데, 상은 누차 전지(傳旨)하여 공을 소환(召還)하였다. 공이 정유년(1657, 효종8)에 별세하자, 상이 유소(遺疏)를 보고 매우 애통해하며, 추은(追恩)을 특별히 후하게 하였다. 그해 10월에 교하(交河)의 월롱산(月籠山) 아래 예장(禮葬)했다가 그후 무오년(1678, 숙종4) 4월에 포천(抱川)의 주금산(鑄金山) 남록(南麓)에 이장(移葬)하였는데, 여기는 곧 공의 선영(先塋)으로 윤 부인(尹夫人)의 묘(墓)가 바로 그 위에 있다.

공은 천품(天稟)이 청수하고 아름다우며 힘써 배워서 학문하는 요점을 알았다. 공이 일찍이 이르기를,


“이 마음은 마치 광풍 제월(光風霽月 비가 갠 뒤의 깨끗한 바람과 달)과 같은 것이니, 야기(夜氣 밤의 깨끗하고 조용한 마음)에서 더욱 알 수 있다.”

하였다. 그러므로 독서(讀書)로써 물을 대듯하여 그 인격의 뿌리를 북돋았다. 이 때문에 글을 짓고 일을 처결하는데도 모두 본말(本末)이 있었다. 일찍이 인조(仁祖)에게 상언(上言)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규모(規模)를 정하고 기강(紀綱)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인주(人主)의 한 마음으로 주장을 삼아, 안으로 남이 알지 못하는 지극히 은미한 곳으로부터 계구(戒懼 경계하고 두려워함)하고 근독(謹獨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일)하기를 더욱 엄격히 하고 더욱 긴밀히 하여 인욕(人欲)은 물러가고 천리(天理)가 밝게 드러나도록 한 뒤에야 이 두 가지 일이 근본한 바가 있어서 정립(定立)될 것입니다. 도(道)를 행하는 데는 가인(家人 한집안사람)에게서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이니, 스스로 반성하여 위의(威儀)를 가진다면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효험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였다. 인조(仁祖)가 몹시 게을러서 시사(時事)가 날로 글러가자, 공은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 배회하며 매사에 후퇴(後退)할 뿐이었고, 정축년 이후에는 더욱 죽지 못한 것을 수치(羞恥)로 여겼었다. 일찍이 하정(賀正)하면서 아뢰기를,


“거(莒)에 있을 때의 마음을 잊지 마시고, 존주(尊周)의 의(義)를 더욱 돈독히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상담(嘗膽)의 사업(事業)에 대해서는 오히려 성상(聖上)의 더욱 견고해진 뜻을 축하하며, 사림(士林)들이 전송(傳誦)하고 있으나 시사(時事)는 더욱 투박하고 해이해져 갑니다.”

하고, 공이 간곡하게 반복하여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 처음부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德)을 닦으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구제하였다면 어찌 오늘날과 같은 변(變)이 있겠습니까. 지금에는 천경(天經)과 지의(地義)를 아주 사소하게 여기고, 민이(民彝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와 물칙(物則 사물(事物)의 법칙)을 괴멸(壞滅)되도록 내버려 두어서 온 천하(天下)의 법칙을 보존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寒心)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대개 공은 상(上)에게 빙탄(氷炭)의 뜻이 해이해지지 않게 하려고 하였고,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마치 내정(內政)을 일으키고 군령(軍令)에 붙인다는 관씨(管氏 춘추 시대 제(齊)의 정승 관중(管仲))의 글처럼 하여, 밖으로는 그 형체가 드러나지 않으면서 안으로는 실상 치도를 확립시키고자 하였으되, 또한 일찍이 인주(人主)의 몸과 마음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효종(孝宗)과 어수계(魚水契)가 있어서, 상(上)이 매양 공을 대인 선생(大人先生)이라 칭하면서 메아리처럼 서로 대화(對話)해 왔는데, 공이 일찍이 상께서 뜻가짐이 너무 예민하여 지레 화(禍)를 초래할 걱정이 있는 것과 상께서 또 수시로 미워하거나 노여워하는 태도가 있는 것에 대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니, 상이 답하기를,


“과인(寡人)은 기욕(嗜欲)을 단절(斷絶)하고 주야(晝夜)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이 마당에 공리(功利)가 말단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진실로 지극히 통분(痛憤)한 일(병자호란 때 청 나라에 항복한 일)이 마음속에 박혀 있어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대각(臺閣)에 당론(黨論)이 서로 치열하여 그를 증오하는 내 마음이 중도를 지나치게 되니, 선생 장자(先生長者)는 이들을 잘 유도하여 이런 풍습이 없도록 할 수 없겠는가.”하였다.


그러나 공(公)은 반드시 상(上)에게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알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너그럽고 인자한 정사(政事)를 청(請)하여 까다로운 정령(政令)을 제거하고, 재간(才幹) 있는 신하를 등용하지 않고 경술지사(經術之士)를 먼저 등용하도록 하였다. 또 양정(良丁 양민(良民)인 장정)이 날로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여 종모법(從母法) 시행하기를 청하였고, 서리(胥吏)들의 횡포를 걱정하여 먼저 당오(堂奧)를 맑게 할 것을 청하였다. 효종은 급급하여 게으름이 없었고, 공은 찬찬하여 빨리 하려는 것이 없었으니 이는 서로가 반대되는 것을 가지고 서로가 일을 성취시킨 것이다.


인조 때에는 공이 상께서 분발하여 힘써서 큰일을 할 수 있도록 하려 하였고, 효종조에는 공이 《주역(周易)》은 말하지 않는 것이 잘 아는 것이라고 하듯이 전혀 말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한 것이다. 또 공은 매양 조론(朝論)이 화합하지 못한 것으로써 양익(梁益 양주(梁州)와 익주(益州))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을 깊이 걱정하여 자주 협동(協同)하는 것을 급선무(急先務)로 삼았다. 그러나 반드시 한마음으로 근본을 삼은 것만은 전후 수십 년 동안에 걸쳐 한 본[模]에서 나온 것과 같았다. 진실로 만일 공의 책략(策略)을 오래도록 쉬지 않고 베풀었다면 태평성세(太平盛世)를 기약할 수가 있었건만, 공이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에 효종께서 또 승하(昇遐)하셨으니, 하늘은 어찌하여 이미 성현(聖賢)을 내놓고서 끝내 그와 같은 액운(阨運)을 내렸는가. 아, 슬프다.


공의 초취(初娶)는 영의정(領議政) 윤승훈(尹承勳)의 딸로서 부덕(婦德)이 훌륭하였는데, 효성을 극진히 하다가 그로 인해 죽자 정려(旌閭)되었다. 후부인(後夫人)은 별좌(別坐) 임경신(任景莘)의 딸로서 4남(男)을 낳았으니 큰아들 민장(敏章)은 청송 부사(靑松府使)이고, 둘째 민적(敏廸)은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고, 셋째 민서(敏叙)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이고, 넷째 민채(敏采)는 벼슬이 지평(持平)에 이르렀으며, 큰딸은 현감(縣監) 이준(李懏)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박세격(朴世格)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 소생으로는 아들이 민철(敏哲)과 민계(敏啓)이고, 딸은 이후필(李後泌)에게 시집갔다.


민장은 도정(都正) 이초로(李楚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정명(鼎命), 둘째는 진명(晉命), 셋째는 태명(泰命)이며, 큰딸은 송주석(宋疇錫)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좌랑(佐郞) 신계화(申啓華)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진사(進士) 김진규(金鎭圭)에게 시집갔다. 민적은 부윤(府尹) 황일호(黃一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사명(師命), 둘째는 부명(孚命), 셋째는 이명(頤命), 넷째는 익명(益命)이며, 큰딸은 김만견(金萬堅)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김도제(金道濟)에게 시집갔다. 민서는 좌의정(左議政) 원두표(元斗杓)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관명(觀命), 둘째는 건명(健命)이며, 큰딸은 홍중기(洪重箕)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남학명(南鶴鳴)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김창립(金昌立)에게 시집갔다.


이준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겸저(謙著), 둘째는 승저(升著)이며, 딸은 김진옥(金鎭玉)에게 시집갔다. 박세격(朴世格)은 2남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태승(泰升)이고, 둘째는 태겸(泰謙)이다.


공의 부인(夫人)은 공보다 18년 뒤에 별세하였는데, 처음에는 춘천(春川) 관천리(冠川里)에 장사 지냈다가 무오년에 이장(移葬)하여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공은 항상 마음이 즐겁고 평온하여 간격이 없었고 또 일찍이 세속에 유동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 공은 내행(內行 집에 있을 때의 처신)이 매우 정직하였고 본디 효제(孝悌)로써 미루어 남에게 미쳤기 때문에, 비록 시론(時論)이 서로 엇갈려 조정에 완전한 사람이 없었지만 공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그의 선(善)을 즐겨 이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대체로 공의 사적을 이루 다 쓸 수 없으므로 다만 그 세도(世道) 및 시사(時事)에 관계된 큰 것만 기록하였으니 이는 또한 공의 뜻이기도 하다.


시열(時烈)은 그윽이 생각건대, 공은 효종 때에 국사를 위해 큰 모의(謀議)를 하는 데 있어 혹 상과 서로 불합한 점이 있었지만 ‘지극히 통분한 것이 마음속에 박혀 있다.’는 전교(傳敎)를 공에게만 분명히 말하였으니, 어찌 공만이 이 말을 들을 수 있었음이 아니겠는가. 이는 마치 성문(聖門 공자(孔子)의 문하)의 3천 명 가운데 오직 단목씨(端木氏 단목은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의 성(姓)임)만이 남이 듣지 못한 것을 들었던 것과 같으니, 후세에 공을 알고자 하는 자는 다만 여기에서 찾아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사람들이 효종의 덕(德)이 하늘처럼 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역시 공으로 인한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생각건대 성고께서는 / 恭惟聖考

천명으로 왕위에 올랐네 / 九五元亨

그 누가 제세(濟世)의 인재였던가 / 誰其在田

대인 선생이었지 / 大人先生

때는 잘 다스려진 시대인데 / 時維上治

서로가 잘도 만났구려 / 蓋相利見

남다른 공을 잘 알아보아 / 識公于異

베푸신 은혜 더할 수 없었네 / 莫尙其眷

공이 북으로 귀양 가 있을 땐 / 昔公在北

모두들 야위었다 하였지만 / 人謂枯槁

공이 돌아와 빙그레 웃으니 / 公歸羑爾

그 옛날의 모습일세 / 昔時氣貌

만인이 이마에 손을 얹으니 / 萬人手額

사마광과 같았네 / 如宋司馬

난봉이 사납지 않으니 / 鸞鳳不鷙

악한 새도 그를 보호하네 / 鴟鴉護邏

성고께서 말씀하되 / 聖考曰咨

공은 나의 시귀로다 / 公我蓍蔡

나의 진취가 부합되지 못하니 / 予就判渙

어찌 다스려지지 못함뿐이랴 / 豈惟未艾

공이 말하되 우리의 일은 / 公曰我事

그 욕망 빨리 성취하기 어려우니 / 難棘其欲

우리 백성들과 화합하고 / 諴我小民

우리 국가 튼튼하게 만들며 / 固我邦國

조정에서 화협하여 / 協和在庭

우리의 힘을 기르되 / 以飽我氣

겉으로는 나타남이 없게 하고 / 泯於無形

마음으론 각오를 단단히 하여 / 內則盡死

원망과 감정을 깊이 쌓았다가 / 蓄憾積怨

적당한 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 持以有待

이는 대개 근본이 있으니 / 此蓋有本

곧 성상의 마음입니다 / 聖上之心

옛날 주 부자는 / 昔朱夫子

송 나라가 망할 때를 당해 / 際宋陸沈

임금에게 진계한 것이 / 其所進戒

가장 은미한 것이었습니다 / 屋漏之微

사욕을 잘 이긴다면 / 我私能克

무슨 일이든 쉽게 성취될 것입니다 / 事無足爲

상이 말씀하되 그러하다 / 上曰兪哉

나는 오직 성공을 바랄 뿐이다 / 我惟仰成

내가 삼가거니 / 予其毖而

공이 어찌 모범을 잃을쏘냐 / 公豈替刑

이 마음으로 서로 도우면 / 以是相濟

일이 아주 안전하리라 하셨네 / 事將萬全

공을 모르는 자는 / 不知公者

공더러 용기 없다 하였지 / 謂公無拳

적은 문득 우리를 해코자 하는데 / 敵忽惎我

하늘은 공을 기어이 남겨 두지 않았네 / 天不憖遺

그러나 전형이 있어 / 尙有典刑

기록이 사씨에게 있으니 / 書在史氏

뒷날 글 짓는 이 있으면 / 後有作者

공의 사적 밝히지 않으랴 / 不其就止

내 공의 묘에 명하면서 / 我銘公墓

이어 성고를 서술하였네 / 仍敍聖考

고요(皐陶)와 후직(后稷)의 모훈처럼 / 比皐稷謨

제덕을 정성껏 훈도했으니 / 帝德是詔

훌륭도 하다 성현들이여 / 休哉聖賢

고금에 길이 빛나리 / 光耀今古





[주D-001]전사(前事) : 이경여(李敬輿)가 일찍이 소현세자의 소생을 세자(世子)로 책봉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일을 말한다.

[주D-002]관상(管商) : 관중(管仲)과 상앙(商鞅). 모두 춘추전국 시대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법가(法家)이다.

[주D-003]정공 엽(鄭公曄)의 …… 겸임하였고 : 본래는 대사성(大司成)을 겸직하지 않았었으나 인조(仁祖) 초기에 문신(文臣) 정엽(鄭曄)이 동지경연

 


 
번호 작성자 제목 등록일 조회수
2 이주관 백강 이경여 선생 신도비명 2009-06-23 2605
1 이주관 축하드림니다. 2009-06-18 2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