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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포김만중선생의 선비정신과 진취적 기상
날짜 2009-09-13 17:47:45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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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외가 선조이시며, 아울러 저의 10대조이신 소재 이이명 선생의 장인이되시어 관심을 많이 가져온 서포 김만중 선생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진취적 기상 등 훌륭한 면모를 본받고자 여기에 살펴봄니다.

 

[약 력]

 

1637(인조 15)∼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소설가. 본관은 광산(光山). 아명은 선생(船生),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다. 충렬공(忠烈公) 익겸(益謙)의 유복자이다.


[생 애]

김만중은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에 힘입어 성장하였다. 아버지 익겸은 일찍이 정축호란(1637)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형 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며 살았다. 윤씨부인은 본래 가학(家學)이 있어 두 형제들이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항상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한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


궁색한 살림 중에도 자식들에게 필요한 서책을 구입함에 값의 고하를 묻지 않았다. 또 이웃에 사는 홍문관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내어 손수 등사하여 교본을 만들기도 하였다.


≪소학≫·≪사략 史略≫·≪당률 唐律≫ 등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연원 있는 부모의 가통(家統)과 어머니 윤씨의 희생적 가르침은 훗날 그의 생애와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만중은 그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세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뒤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관료로 발을 디디기 시작하였다. 1666년에 정언(正言). 1667년 지평(持平)·수찬(修撰)을 역임하였다.


1668년에는 경서교정관(經書校正官)·교리(校理)가 되었다. 1671년에는 암행어사로 신정(申晸)·이계(李稽)·조위봉(趙威鳳) 등과 함께 경기 및 삼남지방의 진정득실(賑政得失)을 조사하기 위해 분견(分遣)된 뒤에 돌아와 부교리가 되었다. 1674년까지 헌납·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675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에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상복문제로 서인이 패배하자 관작을 삭탈당했다. 30대의 득의의 시절이 점차 수난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에 그의 형 만기도 2품직에 올라 있었고 그의 질녀는 세자빈에 책봉되어 있었다.


그는 이보다 앞서 1679년 예조참의로 관계에 복귀하였다. 1683년에는 공조판서로 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에 사헌부의 조지겸(趙持謙)·오도일(吳道一) 등이 환수(還收)의 청(請)이 있자 이를 비난하다가 체직(遞職 : 직무가 바뀜.)되었다. 3년 뒤인 1686년에 대제학이 되었다.


1687년에 다시 장숙의(張淑儀)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의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추국(推鞠 : 특명으로 중죄인을 신문함.)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1년이 지난 1688년 11월에 배소에서 풀려 나왔다.


그러나 3개월 뒤인 1689년 2월 집의(執義) 박진규(朴鎭圭), 장령(掌令) 이윤수(李允修) 등의 논핵(論刻)을 입어 극변(極邊)에 안치되었다가 곧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같이 유배가게 된 것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의 여화(餘禍) 때문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의 어머니인 윤씨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로 1692년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98년 그의 관작이 복구되었다. 1706년에는 효행에 대하여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활동상황]

김만중의 사상과 문학은 이전의 여느 문인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말년에 와서 불운한 유배생활로 일생을 끝마쳤따. 그러나 생애의 전반부와 중반부는 상당한 권력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득의의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총명한 재능을 타고났다.


그리고, 가문의 훌륭한 전통 등으로 인해 그의 학문도 상당한 경지를 성취하였다. 그가 종종 주희(朱熹)의 논리를 비판했다든지 아니면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든지 하는 점은 결코 위와 같은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만중의 사상의 진보성은 그의 뛰어난 문학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정한 한계는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국문가사예찬론’은 주목받아 마땅한 논설이다. 그는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한문은 ‘타국지언(他國之言)’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철(鄭澈)이 지은 〈사미인곡〉 등의 한글가사를 굴원(屈原)의 〈이소 離騷〉에 견주었다. 이러한 발언은 그의 개명적 의식(開明的意識)의 소산으로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김만중이 ‘국민문학론’을 제창하였다고 할 만큼 그의 문학사조상의 공로는 매우 큰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용어 사용이 적절한 것인지는 재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만중이 살던 시대는 분명 중세의 봉건질서가 붕괴된 시대는 아니었던 만큼 국민문학이라는 용어도 성립할 수 없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적어도 ‘국민문학론’이 제창되는 것은 조선왕조가 끝나고도 한참 뒤에나 가능할 노릇이기 때문이다.


김만중의 우리말과 우리 글에 대한 일종의 ‘국자의식(國字意識)’은 충분히 강조될 만하다. 더구나 그가 〈사씨남정기〉와 같은 국문소설을 파다하게 창작했다는 점과 관련해 보면 허균(許筠)을 잇고 조선 후기 실학파 문학의 중간에서 훌륭한 소임을 수행한 것으로 믿어진다.


김만중은 시가와 소설에 대해서 상당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김만중은 소설의 통속성에 대하여 진수(陳壽)의 ≪삼국지≫나 사마광(司馬光)의 ≪통감 通鑑≫, 그리고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 三國誌演義〉를 서로 구별하여 통속소설에 대한 예술적 기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김만중은 한시 시학의 표준으로 고악부(古樂府)와 ≪문선 文選≫의 시를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율시(律詩) 이전의 시를 배울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 점은 주희의 학시관(學詩觀)과 상통하면서도 인간의 정감과 행동을 중요시하는 연정설(緣情說)을 시의 본질로 본 것으로 특징적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363수에 이르는 그의 시편들의 주조를 형성하는 단서로 작용하였다.


김만중의 많은 시들에서 그리움의 정서가 자주 표출되고 있는 점은 그의 생애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고시 계열의 작품을 애송하였던 것과도 맥이 닿고 있다. 장편시인 〈단천절부시 端川節婦詩〉는 그의 주정적(主情的) 시가관(詩歌觀)에서 지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그 밖에 그의 소설이나 시가에서 많은 인물이 여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도 흥미있는 현상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의 낭만주의적 정감의 전달 대상으로 선택된 것 같다.


국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주로 〈구운몽〉·〈사씨남정기〉 등과 같은 소설이었다. 그러다가 근년에 들어와서 그의 시가에 대한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


김만중은 비교적 다른 인물보다 많은 연구논문들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새롭게 고찰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의 생애를 완벽하게 재구성해 보는 문제와 소설과 시가 사이의 관계, 또는 그의 사상의 진보성과 한계 등에 대한 정밀한 탐색이 계속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방면에서의 축적된 연구성과 위에 김만중과 그의 문학이 문학사적 전망 속에서 보다 뚜렷한 모습으로 비추어지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西浦文集

≪참고문헌≫ 西浦漫筆

≪참고문헌≫ 金萬重(李明九, 韓國의 人間像, 新丘文化社, 1967)

≪참고문헌≫ 九雲夢硏究(丁奎福, 高麗大學校出版部, 1976)

≪참고문헌≫ 西浦小說硏究(金戊祚, 螢雪出版社, 1976)

≪참고문헌≫ 西浦家門行狀(宋百憲, 형설출판사, 1982)

≪참고문헌≫ 金萬重硏究(丁奎福, 새문社, 1984)

≪참고문헌≫ 西浦年譜(金炳國 외 번역, 서울대학교출판부, 1992)

≪참고문헌≫ 金萬重文學硏究(丁奎福 外, 국학자료원, 1992)

≪참고문헌≫ 金萬重論(朴晟義, 思潮 2 思潮社, 1958)

≪참고문헌≫ 金萬重硏究(金茂祚, 동아논총 5, 동아대학교, 1969)

≪참고문헌≫ 西浦의 漢詩考(金戊祚, 又軒丁仲煥博士回甲紀念論集, 1974)

≪참고문헌≫ 西浦評論硏究(金周漢, 嶺南語文學 3, 1976)

≪참고문헌≫ 金萬重論(丁奎福, 한국문학작가론, 螢雪出版社, 1977)

≪참고문헌≫ 西浦漢詩硏究(趙鍾業, 語文硏究 9, 1976)

≪참고문헌≫ 金萬重(趙東一, 韓國文學思想史試論, 지식산업사, 1979)

≪참고문헌≫ 西浦漫筆에 나타난 批評의 特性(崔信浩, 韓國學報 25, 一志社, 1981)

≪참고문헌≫ 西浦의 생애와 한문학에 대한 재조명(尹浩鎭, 민족문화 10, 민족문화추진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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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인물 >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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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謝氏南柾記) ]

김만중(金萬重) 저

수록교과서 : 선영사




   명나라 가정연간금릉 순천부에 사는 유현이라는 명신은 늦게야  아들 연수(延壽)를 얻는다. 유공의 부인 최씨는 연수를 낳고 세상을 떠난다. 연수는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고 한림학사를 제수받으나, 연소하므로 10년을 더 수학하고 나서 출사하겠다고 한다. 천자는 특별히 본직을 띠고 6년 동안의 여가를 준다. 유한림은 덕성과 재학(才學)을 정비한 사씨와 결혼한다. 사씨는 유한림과의 금슬은 좋으나 9년이 되어도 출산을 못한다. 이에 사세는 남편에게 새로이 여자를 얻기를 권한다. 유한림은 거절하나 여러 번 권하니 마지못해 교씨를 맞아들인다. 교씨는 천성이 간악하고 질투와 시기심이 강한 여자로, 겉으로는 사씨를 존경하는 척하나 속으로는 증오한다. 그러다가 잉태하여 아들을 출산하고는 자기가 정실이 되려고 마음 먹곤 문객 동청과 모의하여 남편 유한림에게 온갖 침소를 한다. 유한림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교씨가 자신이 낳은 아들을 죽이고 죄를 사씨에게 뒤집어씌우니, 사씨를 폐출시키고 교씨를 정실로 맞이한다. 교씨의 간악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 문객 동청과 간통하면서 유한림의 전재산을 탈취해 도망가서 살기로 약속하고, 유한림을 천자에게 참소하여 유배시키는 데 성공한다. 유한림을 고발한 공으로 지방관이 된 동청은 교씨와 함께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지른다.


   이때, 조정에서는 유한림에 대한 혐의를 풀어 소환하고, 충신을 참소한 동청을 처형한다. 정배를 당한 유한림은 비로소 교씨와 동청의 간계에 속은 줄 알고 전죄를 뉘우친다. 정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유한림은 사방으로 탐문하여 사씨의 행방을 찾는다. 한편, 남편 유한림이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은 사씨는 산사에서 나와 남편을 찾으러 나선다. 사세와 유한림은 도중에서 해후한다. 유한림은 사씨에게 전죄를 사과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간악한 교씨를 처형하고 사씨를 다시 정실로 맞이한다.




 

이 작품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책봉한 사건에 대하여 숙종의 혼심을 회오하게 하여 모든 것을 원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권선징악의 수법을 고도로 원용하여 쓴 폭로·풍간(諷諫)소설이라 할 수 있다. 작가 김만중이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는 일반적으로 쟁총(爭寵으로 보고 있으나, 오히려 덕(德)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성혼 과정에서매파가 사소저의 미색을 칭찬하자 유현은 덕을 강조하여 말했고, 또 사부인이 남편 유한림에게 소실을 얻도록 주선해주는 것은 부덕(婦德)의 소치이다. 그리고 교씨의 간교로 인해 시가에서 쫓겨난 사부인이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시부모의 산소에서 지내는 것은 끝까지 덕을 실행 해보려는 강인한 의지의 발로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쟁총형의 가정소설이라기보다는, 인간에 있어서의 덕성을 강조함으로써 민비폐출의 부당성을 풍간하기 위한 풍간소설이다. 인물구성을 보면, 사부인은 고매한 부덕의 소유자로 설정해 놓은 반면, 첩은 간교한 여인으로 등장시켜 악녀를 선녀에 대립시킴으로써 여주인공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다 유한림의 숙모인 두부만은 선악을 판단하는 사리 판별자로서 기능하며, 또한 다가올 일을 암시하는 복선의 기교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소설의 구성면에 있어서는, 다른 고전소설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사건전개에 큰구실을 한다. 사부인이 시부모 묘하에 쫓겨나 있을 무렵 두부인의 위조 편지를 받고, 비몽사몽간에 최부인이 현몽하여위기를 모면하게 되고, 여승 묘혜가 사부인과 상봉하여 사부인의 곤경을 벗어나게 해준 것도 역시 꿈의 계시에 의해서였으며 유연수의 중병을 고치는 일, 위기에서 구출되는 일등 모두가 현몽의 덕분이다. 이처럼 꿈을 지나치게 과용한것이 이 작품의 구성상의 흠이라 하겠으며 이는 또한 실감을 크게 감퇴시키고 있다.




▶연대 : 숙종 15년~18년(1689~1692)

▶갈래 : 국문소설, 가정소설, 목적소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문체 : 문어체

▶주제 : 처첩간의 갈등과 사씨의 고행

▶배경 : 중국 명나라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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