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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덕(婦德)의 아름다움 [신빈김씨]
날짜 2010-01-15 15:27:02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4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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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부인으로 밀성군의 어머니가 되시는 신빈 김씨의 깊은사랑과 인자함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씨와 행실은 후대에 높이 칭송되어 왔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우리들에게 좋은 본으로 눈여겨 보아야할 것으로 생각 됨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여성의 아름다움과 그 중대한 역할에는 본질적인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세게적으로 여성인권신장의 원동력이 되어온 성경(New Testament)에서도 사도 바울(Saint Paul)은 우리선조님들이 말씀하신 "부부유별'과 거의 같은 뜻으로 남편과 아내의 다름과 또한 한몸됨을 상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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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빈 김씨 (愼嬪 金氏) ..  조선 최고의 신데레라. 

신빈 김씨 (愼嬪 金氏. 1406~1464)는 김원(金元)의 딸로,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궁인(宮人)이 되었다.

 

 

훗날 세종의 성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고, 1427년 첫아들인 게양군을 낳았다. 그 후 소의 (昭儀)를거쳐 1439년에 귀인 (貴人)에 진봉되었고, 이후 신빈(愼嬪)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천성이 부드럽고 매사에 조심스러워 소헌왕후에게도 사랑을 받았으며, 소헌왕후는 그녀에게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 (乳母)역할을 맡기기도 하였다.

 

 

 

 

 

 

世祖 10년, 1464년에 59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世祖는 쌀, 콩 등 모두 70석(石)을 부의(賻儀)로 하사하였다.  평민에서 세종대왕의 후궁에 까지 오른 그녀의 일생이 드라마틱하고, 조선 최고의 신데렐라라고 얘기하지만,

 

 

그러한 신분 상승을 떠나, 그녀의 世宗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아름답고 깨끗한 삶은 조선의 유교적 가치관을 떠나서라도 그 자체가 아름답다. 300여년이 지나 正祖가 화성의 융건능으로 참배를 갈 때에 그녀의 삶을 칭송하며 그녀의 墓에 치제를 드리게 하였을 정도로....

 

 

그 녀는 오로지 온화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만으로 신데렐라가 되었다.

 

 

 

 

 

 

 

 

 

 신빈(愼嬪)이 죽은지 300년이 지난  1797년 8월 17일, 正祖는 화성으로 부친(사도세자)를 참배하러 가는 길에  이곳에 들러 치제(致祭)를 올리도록지시한다. 치제(致祭)란 왕이 재물과 祭文을 내려 죽은 신하를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正祖가 내린 제문(祭文)은 다음과 같다.  " 온화하게 아름다운 덕으로 인후한 공자를 많이 낳았다. 왕후를 공경하고, 여러 후궁과도 잘 지내 왕가의 번성에 큰 일을 하였다. 매사를 은혜롭게 하고 겸손함으로 왕실을 화목하게 만들었다. 임금이 탄 수레가 처음 머추니 무덤 앞에 선 돌짐승이었다.

바라건데 이 잔을 흠향하시고, 세대가 아득하다고 하지 마소서........."

 

 

 

300년이 지난 뒤에도  정조의 제문(祭文)으로 칭송되는 그녀의 인간성은 ? 그녀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조선 초기의 왕들은 많은 王子를 생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왕자가 많아야 신생국 조선의 기틀과 왕권을 확실히 다질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슴은 분명하다.

 

 

세종대왕만 하더라고 소헌왕후(昭憲王后)를 비롯해 벼슬을 내린 부인만 여섯명이었고, 자녀는 모두  22명, 즉 아들 18명과 딸 4명이었다.

 

 

 

 

 

 

 

 

上王인 태종 이방원은 소헌왕후와 잘 살고 있는 세종에게  4명의 후궁을 추천한다. 그리고  태상왕(太上王)이자 세종의 큰아버지인 定宗은 세종이 즉위하고 6년이 지난 후 정승인 변계량을 불러 "소헌왕후가 이미 세자를 낳았으나, 임금의 자손은 넓히지 아니 할 수 없으니, 대신들이 의논하여 ,후궁이 될만한 여인들을 선택하여 보고하라..."고 명을 내린다.

 

 

세종도 이러한 뜻을 잘 알았다. 그는 世子도 후궁을 가질 수 있도록 법을 만든 것이다.

 

 

 

 

 

 

 

 

 

 

 

 

                                       신빈 김씨의 입궁 (入宮)

 

 

 

태종 이방원은 원래의 世子이었던 양녕대군을 폐세자 (廢世子)하여 사가(私家)로 내 쫒고, 후일 세종대왕이 되는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삼게 된다. 그리고 태종은 물러나 상왕(上王)이 되면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종의 비(妃)인 원경왕후는 대비(大妃)가 된다.

 

 

宮女는모두 王의 여인 .. 태종과 양녕대군을 모셨던 궁녀들은 모두 방출되어야 했고, 이는 궁녀의 운명이었다.  기존의 궁녀들이 방출되면  새로운 궁녀를 충원해야 하는 것...이 과정에서 신빈김씨(愼嬪金氏)는 13세의 나이에 궁녀가 되어 入宮하게 된다.

 

 

그녀의 좋은 품행을 알게된 원경왕후에 의하여 신빈김씨는 소헌왕후의 지밀(至密)나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세종의 눈에 띄어 결국 그녀의 나이 21세, 世宗이 즉위한지 6년 만에 세종의 성은을 입어 첫 아들인 계양군을 낳았다.  이때부터 그 녀는 12년동안 모두 6명의 아들을 낳았다.

 

 

12년 동안 꾸준히 왕을 모시면서 줄곧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면서도 소헌왕후와의 갈등은 전혀 없었다. 소헌왕후는 오히려 신빈김씨를 믿고 중요한 일을 맡기기도 하였다.

 

 

 

 

 

 

                         태종, 세종과 소헌왕후, 신빈김씨 그리고 수양대군.

 

 

 

태종은 웡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외척인 여흥민씨(驪興閔氏)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또한 세종의 외가이자 소헌왕후의 친정인 청송심씨(靑松沈氏) 가문도 거의 멸문에 이를 정도로 제거하였다.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있는 세력들을 미리 제거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헌왕후의 아버지이자 세종의 장인인 심온(沈溫)도 사사(賜死)되었던 것이다.

 

 

세종은 아버지의 권위 앞에 아무 말 못하였고, 시류에 따라 역적(심온을 지칭)의 딸인 소헌왕후도 폐위시켜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청에도 불구하고 그저 無事한 것만으로 위안삼아야 했다.

 

 

이러한 소헌왕후에게 세종은 애틋하게 대하였고, 금실이 좋아 두 사람 사이에서 매년 아이를 생산하게 된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을 낳은지  2년후에  안평대군이 태어난다. 안평대군에게 사랑이 기울자 칭얼대는 수양대군의 양육은 신빈김씨에게 주어졌다.

 

 

업어 키운 사정을 알게 된 수양대군은 어머니로서 신빈김씨를 예우하였고, 신빈김씨의 2남 의창군이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어도 불문에 붙이고 , 3남 밀성군이 자신의 거사에 가담하지 않았어도 후일 중용한 것은 바로 신빈김씨에 대한 배려이고 보답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1434년 세종 16년에 소헌왕후는 막내아들 영응대군을 낳았고,  막내에 대한 세종과 소헌왕후의 사랑은 끔찍하였다. 그 아들의 양육을 신빈김씨에게 맡겼다.

 

 

世宗은 도승지 김돈에게 그 이유를 말하는데,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 신빈은 원경왕후(大妃)와 소헌왕후의 양궁(兩宮)을 섬기는 일에 오직 삼가고 근신하였다. 소헌왕후가 매사를 신빈에게 위임하고 막내아들의 양육까지 맡겼다. 성품이 바르고 근신하지 않았다면 중전이 아들을 맡겼겠느냐 ... "

 

 

 

 

 

 

 

 

                                                                세종의 사후(死後)

 

 

 

세종이 죽고 文宗이 즉위하면서, 문종은 신하들과 의논한다. 신빈김씨가 계속 영응대군과 한 집에서 살게하면 어떻겠느냐? 고.. 신하들은 반대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의논이었다.

 

 

 

신빈김씨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된 것이다. 신빈김씨는 자신에게 지극한 사랑을 베푼 세종과 피붙이 같은 情으로 자신을 대하여준  소헌왕후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비구니가 된 것이다. 왕과 왕후를 이렇게 지성으로 모신 신빈의 아름다운 마음과, 소헌왕후의 넓은 마음 그리고 세종의 처세가 뛰어 낫기에  이들은 통속적인 삼각관계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신빈김씨는 세종이 승하하자 곧 머리를 깎고, 종로구 옥인동에 있던 자수궁(慈修宮)에 들어갔다. 자수궁은 한때  5,000명의 여승이 머물던 ( 宮女들이 궁에서 나오면 노후를 이 곳에서 많이 지냈다..) 커다란 승방이었다. 

 

 

 

 

 

신빈김씨가 자수궁에 들어가자, 그 녀의  6명의 아들들이 가만 있지 않았다. 자신들이 모시겠다고 나오라 해도 거절하기만 한다. 아들들은 왕인 문종과 단종에게 주청하여 어명으로 어머니를 나오게 하려 했지만  신빈은 환속(還俗)하라는 어명에 다음과 같이 답하며 거절한다.

 

 

" 세종대왕으로부터 크나큰 은혜를 입었으니. 세상 일을 잊고 대왕을 추모하며 살게 해 주십시요 "

 

 

 

世祖가 즉위하면서 저택을 하사하며 아들들과 함께 살 것을 권유하였으나 신빈은 끝까지 모른 척하였다. 

 

 

부귀와 영화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로지 世宗의 명복만을 빌면서 10년후에 58세를 일기로 돌아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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