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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라의 방위[防衛] - 포암 이사명 선생
날짜 2010-01-17 21:39:09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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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헌법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유지 발전시켜 세계 선진국으로 발돗음 하기 위하여는 먼저 내우외환으로부터 나라의 굳건한 방위가  우선되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율곡 이이 선생은 나라 방위를 위하여 "십만양병"을 주장한 바 있으며, 이후 포암 이사명 선생[백강 이경여 선생의 손자]도 양반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병역을 부담하는 "호포제"와 "12만화포병 양성"을 건의 한바 있어 이에 소개한다.

 

이러한 율곡선생 건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아니하여 임진왜란을 불러오고 ,포암선생의 건의도 실현되지 아니하고 나라 밖의 사정에도 어두워 결국 나라를 잃는 설움을 가져오는 단초가 되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숙종13년(1687년) 9월26일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사명(李師命)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그끄저께 군병 성지 주함 총수 책자(軍兵城池舟艦總數冊子)의 진어(進御)에 대한 뜻을 가지고 진달하여 윤허받았었습니다. 이어 생각해 보건대, 우리 국조(國朝)의 병제(兵制)는 대략 세 번 변경되었습니다. 고려(高麗) 말기에 가병(家兵)의 화(禍)로 마침내 나라가 망하게 되었었기 때문에, 아조(我朝)는 개국(開國) 초기에 친병(親兵)을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에 소속시키고, 주현(州縣)의 군사를 안렴사(按廉使)·진무사(鎭撫使) 등의 관원에게 소속시켜, 규모는 비록 정해졌었지만 절목(節目)은 상세하게 갖추지 못했었습니다. 태종(太宗)세종(世宗) 양대(兩代)에 미쳐서는 충의위(忠義衛) 등 7위(衛)의 기보병(騎步兵)·보충대(補充隊)·갑병(甲兵)·팽배(彭排)·대졸(隊卒) 등의 군사를 오위(五衛)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윤번(輪番)으로 쉬게 하되, 수시로 간열(簡閱)하기를 한(漢)나라 남북군(南北軍)6087) 의 제도처럼 하였습니다. 이를 가지고 서울을 숙위(宿衛)하고 이를 가지고 한편으로 적국(敵國)에게 위엄을 보여, 2백 년 동안 국가의 정세가 공고(鞏固)하고 남북(南北)이 편안했었습니다. 그때에는 전졸(戰卒)의 수가 10만을 넘다가 불행히도 오래 편안히 지난 나머지 법도가 해이해져, 번상(番上)한 군사가 역역(力役)을 하도록 변경되고, 정번(停番)인 군사에게 포(布)를 내라고 독촉하게 되었고, 임진년6088) 무렵에 이르러서는 중외(中外) 각위(各衛)에 이미 전투를 감당할 군사가 없게 되었었습니다. 왜구(倭寇)들이 갑자기 닥치는데도 주현(州縣)에 군사가 없으므로 부득이 속오군(束俉軍)6089) 의 제도를 만들어 한때의 위급을 구원했었고, 또한 도감(都監)의 군사를 모집하여 숙위(宿衛)에 쓰도록 하였습니다. 반정(反正)한 초기(初期)에 이르러서는 장수인 신하들이 각기 군사를 모집하자, 어영청(御營廳)·총융청(總戎廳)의 군사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나갔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또한 금위영(禁衛營)의 군사를 새로 두었습니다마는, 그러나 전투를 감당할 만한 군사는 몇 만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이른바 기보병(騎步兵)은 이미 베를 바치게 하던 양정(良丁)이고, 이른바 속오군(束俉軍)은 곧 훈련받지 않은 시골 민중들이니, 갑자기 위급한 일이 있게 된다면 비록 한신(韓信)6090) 이나 백기(白起)6091) 로 장수를 삼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어떻게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비록 크게 변통을 하여 옛적의 제도대로 복구는 할 수 없을지라도, 만일 그 사이에 짐작하여 가감한다면 훈련된 군사 10만은 그래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신(臣)이 낮이나 밤이나 마음속에 잊지 못했던 것인데, 이번에 군병(軍兵)의 총수(總數)를 진어(進御)하심에 따라 대략 구구하게 생각하고 있는 바를 털어놓았습니다마는, 자세한 절목(節目)에 있어서는 감히 먼저 진달하여 많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게 할 수 없습니다. 지난 선조조(宣祖朝)에 선정신(先正身) 이이(李珥)가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환란에 대비하기를 청했었는데, 그 때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아무 일도 없는데 백성을 동요시킴은 그르다고 했었기 때문에, 이이가 마침내 한 가지 계책도 조치해보지 못하고서 뜻만 가지고 있다가 몰(沒)했었습니다. 그 뒤 임진 왜변(壬辰倭變)의 초두에야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뒤쫓아 그의 말을 써주지 않은 것을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일에 앞서 근심해야 그 근심이 없어지게 될 수 있고, 일이 닥쳐서야 근심하면 그 일에는 소용이 없다.’고 했었으니, 이는 어찌 오늘날 감계(監戒)삼아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신이 어제 연중(筵中)에서 삼가 성상의 분부를 받들건대, 저들 서쪽 달자(㺚子)들의 일 때문에 장신(將臣)들에게 계칙(戒飭)하시는 바가 있으셨습니다. 만일 오늘날에 근심거리가 되는 바를 혹시라도 수십년 동안 아무 일이 없게 되도록 한다면, 뒷날에 일을 담당하는 신하들이 오히려 계획을 해가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앞당겨 10여 년 이내에 일이 생기게 된다면, 훈련하지 않은 시골 백성을 가지고 이후의 한없는 사변(事變)에 적용해 가려고 하더라도 어찌 위태롭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존망(存亡)에 관한 큰 계책이므로 반드시 성명(聖明)께서 스스로 득실(得失)을 살펴보아 결단코 그렇게 될 이치를 알아차리시고서 굳게 뜻을 세우고 착실하게 일을 해간 다음에야, 약세(弱勢)를 바꾸어 강세(强勢)로 만들어서 공을 세우게도 되고 일을 이루게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차자에 진달한 일은 국가를 위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므로, 마땅히 묘당(廟堂)과 함께 충분하게 강구하여 변통해 가겠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111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軍事) / *외교(外交)



 


 


 


 


 

 

 
 

 

숙종 7년(1681년) 12월15일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사명(李師命)이 소(疏)를 올려 호포(戶布)에 대하여 논(論)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현재 중앙과 지방의 비용이 해마다 수십만 필(匹)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이 무오년3640) 의 서울과 지방의 장부[帳籍]를 가져다 상고하여 보니, 원호(元戶)가 1백여 만이며 그 중에서 대략 공천(公賤)·사천(私賤)과 폐질자(廢疾者)·유면자(流丐者)로 포(布)를 징수할 수 없는 자 40여 만 호를 제외하면 포를 징수할 수 있는 실호(實戶)는 70여 만입니다. 지금 만약 당(唐)나라 때 민정(民丁)을 계산하여 용(庸)3641) 을 하게 하던 법을 대략 모방하여 한 집안의 남녀(男女) 상하(上下) 8구(口) 이상을 완호(完戶)라고 하여 봄과 가을에 각각 포(布) 한 필(疋)을 바치도록 하고, 8구 이하를 약호(弱戶)라고 하여 단지 가을에만 한 필을 바치도록 하되, 그 토산(土産)을 따라서 더러는 면주(綿紬)로 더러는 마저(麻紵)로 더러는 은전(銀錢)으로 하게 하면, 한 해에 바치는 것이 8, 90만 필이 될 것이니, 제반 신역(身役)의 값과 주현(州縣) 군병(軍兵)의 수요에 두루 지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이 법이 옛날에 가장 적합하였던 것은 단지 호강(豪强)한 족속들이 감히 혼자만 빠져나올 수 없고 하호(下戶)들도 치우치게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으니, 재물을 거워들이는 것이 적으며, 사람을 부역시키는 것이 균등하며, 규정을 만드는 것이 간략하며, 법을 취함이 원대하여, 전지(田地)가 있는 자는 여기에 따른 세금이 있으며 가호(家戶)가 있는 자는 여기에 따는 포(布)가 있어 백성들에게는 일정한 구실이 있으며, 국가에는 항상 쓸 수 있는 재물이 있게 되며, 한정(閑丁)이 남아 돌아 투사(鬪士)가 저절로 갑절이나 되며 백성들의 구실이 줄어들어 국가의 비용이 저절로 충분하게 됩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벼슬이 있고 직임이 있는 자가 아래로 민간의 호적에 편입하여 같이 집집마다 부과되는 부역을 한다면 너무나 군자(君子)와 야인(野人)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귀천(貴賤)을 구분하지 않고 균일하게 신포(身布)3642) 를 바치게 한다면 의논하는 사람의 말이 오히려 옳겠지만, 집집마다 구실을 바치는 것이 전지의 조세(租稅)를 내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재상(宰相)의 전지도 이미 세금을 면하지 못한다면 이런 가호(家戶)가 어떻게 홀로 누락될 수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지금 편성된 호적의 태반이 빈곤하고 잔약하여 거둬들이는 즈음에 틀림없이 채찍을 사용하여 포학한 것으로 포학한 것을 바꾸게 되어 서로의 차이가 거의 없다.’ 하는데, 이것이 비록 같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집안의 늙은이나 젊은이나 식구 수를 계산하여 포(布)를 거둬들이면서도 오히려 민망하고 가련하게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며, 한 가호에 한 필을 해마다 그 용(庸)으로 다하게 해도 오히려 무겁게 여기면서 바치기 어렵다고 하니, 이것은 실로 마음씀이 균일하지 않고 치우침이 좌우(左右)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도망하였거나 물고(物故)되었거나 아약(兒弱)에게와 백골(白骨)에게 포(布)를 징수하는 폐단은, 고금(古今)에 찾아본들 어찌 이런 가혹함이 있었겠습니까? 호포(戶布)를 시행함에 있어서 비록 더러 원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오늘날의 신역(身役)보다 낮지 않겠습니까? 의논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천례(賤隷)는 본래 양민(良民)보다 많은데, 만약 이 부류들을 제한다면 구실을 부담하는 집이 틀림없이 적을 것이며, 아울러 포(布)를 거둬들이는 데 첨입시킨다면 한 몸에 두 가지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장(丁壯)은 편오(編伍)3643) 에 돌리고 노약(老弱)은 그 보솔(保率)에 채운다면 마침내 겹으로 구실하는 근심이 있을 것이다.’고 하는데, 이것은 실제로 호포(戶布)의 근본 뜻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시험삼아 관서(關西)의 호구(戶口)를 관찰해 보면, 17만 내에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이 겨우 3만여 호(戶)에 이르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다른 곳도 비슷하게 알 수 있습니다. 어찌 70여 만의 호(戶)로서 50만 필(疋)의 구실이 부족하여 천례(賤隷)에게까지 침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반드시 이 법을 결단하여 시행하려고 하는 것은, 한갓 양민(良民)의 부역을 펴게 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하여 깊고 멀리 염려하는 것입니다. 오위(五衛)가 이미 무너진 뒤에 지금 전투를 맡은 군졸은 단지 어영(御營)·정초(精抄)·별대(別隊)의 호수(戶首)와 훈국(訓局)의 포수(砲手) 3만여 인입니다. 그런데 속오군(束伍軍) 20여 만과 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의 아병(牙兵) 및 각도(各道)에서 새로 뽑은 2만여 인은 모두 향토(鄕土)의 자위(自衛) 집단으로 훈련받지 않은 자들입니다. 갑자기 급박한 일이 있으면 모두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 호포(戶布)를 팔도[八路]에 통용하여 시행한 뒤에는 각역(各役)의 호수(戶首) 외에 보인(保人)으로서 포(布)를 거둬들이던 부류는 모두 한가하게 놀며 구실이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신이 여러 아문(衙門)의 각도(各道) 군안(軍案)을 상고하여 보니,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의 호적에 양계(兩界)를 제외한 호수와 보인을 합하면 거의 50만인데, 어영청(御營廳)의 호수와 보인을 합하면 8만여 인이며, 정초(精抄)와 포보(砲保)와 별대(別隊)를 합하면 10만 인이 되니, 합해서 계산하면 30여 만입니다. 거기서 이미 훈련된 병졸 4만 인과 또 보인(保人) 중에서 날래고 용맹스러운 자 8만 인을 뽑아 12만 인을 만들어 한 대(隊)에 화병(火兵) 2인을 지급하여 12번(番)으로 나누어 3대장(大將)에게 소속시키면, 1번(番)을 6천(千) 인으로 만들어 3천 인은 서울의 3영(營)에 입번(入番)시켜 두 달 동안 조련(操鍊)해서 교체하게 하며, 3천 인은 육도(六道)에 나누어 소속시켜 두 달 동안 입방(入防)하다가 돌아가도록 하여 윤번(輪番)으로 상하(上下)가 교대로 중앙과 지방에 있게 해서 송(宋)나라 조정의 금위(禁衛) 제도와 같이 한다면, 한 해 동안 훈련된 군사가 거의 4만 인에 이를 것이며, 3년 안에 12만의 화포병이 모두 정교하게 훈련된 군종이 될 것입니다. 다만 서울과 지방에 모두 입방(入防)과 입번(入番)의 군사를 배치하게 되면 당장 군량 5만여 석을 써야 하는데, 서울의 경우는 연해(沿海)와 연강(沿江)의 호포(戶布)를 쌀로 바꾸어서 수송하여 바치게 하고, 지방의 경우는 호포를 선혜청(宣惠廳)에 옮겨 주어 산군(山郡)의 대동법(大同法)에 의해 부과되어 거둬들이는 무명을 쌀로 바꾸어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실어다 바치도록 한다면, 비용은 10여 만 필에 지나지 않지만 군사들은 오래도록 배부를 수 있으며, 관(官)에서는 다시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고, 소(疏)의 끝부분에 또 특별히 중신(重臣)으로 재능과 식견이 있는 자를 가려뽑아 그로 하여금 산해(山海)의 이익을 맡아 주관하게 하고, 겸해서 주선(舟船)의 세(稅)를 관리하도록 하여, 고금(古今)을 참작해서 그 방편(方便)을 다하도록 한다면,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않아도 국가의 비용이 저절로 충분해질 것이라고 주청하고, 또 화매(和賣)해야 곡식을 축적하는 방편을 진술하자, 임금이 답하기를,

“누누이 조목조목 계획한 것이 오로지 나라를 근심하는 심원한 생각에서 나왔으니, 매우 아름답게 여기고 칭찬할 만하다. 정말 이것을 잘 시행한다면 누적된 폐단을 제거할 수 있고 생민(生民)들을 소복(蘇復)시킬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크게 다행함이 아니겠는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모두 상세하게 반복(反覆)해서 변통(變通)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571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재정(財政) / *군사(軍事) / *호구-호적(戶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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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포제 (고려·조선 세제)  [戶布制]
출처: 브리태니커

전근대사회에 호를 단위로 면포나 저포를 징수하던 부세제도.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는 잡공(雜貢)을 없애기 위해 실시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군역제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제기되었다. 조선 후기에 제기된 호포제는 양반도 군포(軍布)를 부담함으로써 신분에 따른 군역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방안이었다. 양반층의 반대로 논의만 거듭하다가 결국 1871년(고종 8) 대원군에 의해 시행되었다. 원래 호포제는 고려 후기인 1296년(충렬왕 22) 홍자번(洪子藩)의 주장에 따라 처음 실시되었다. 이는 잡공을 없애기 위한 것으로 평민에 한해 호(戶)를 단위로 저포를 징수하는 제도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요역 대신 충청도·황해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 등의 민호(民戶)에 포를 징수하도록 부과했다. 그 액수는 호를 대·중·소로 나누어 대호는 2필, 중호는 1필, 소호는 반필을 납부하도록 규정했으나 저화법(楮貨法)이 제정되면서 폐지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조선은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상비군제도인 5군영(五軍營)을 신설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한 방위체제를 수립했다. 그런데 5군영의 신설 과정에서 군역제도의 운영에 적지않은 폐단이 발생했다. 이 시기에 나타난 군역폐단의 중요한 원인은 첫째, 당시 사회변동과 관련하여 중세적인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양인 가운데 많은 수가 양반층으로 상승해 군역부담에서 이탈함으로써 군역을 부담할 양인층이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둘째, 군역을 담당하는 농민들의 경제력을 고려하지 않고 군포를 수취했다는 것이다. 원래 농민에게 군역을 부담시키려면 토지를 분급해서 부세를 담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조선 전기 이래 농민들에 대한 토지분급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지주제에 의해 군현단위로 거두어들이는 총액제가 고정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변동이나 농민들의 경제사정과 관계없이 양인농민층에 집중적인 부담을 주었다. 그밖에 5군영이 설치되면서 군액이 지나치게 많다든가, 군역제도 자체가 다양하고 무질서하게 편성되어 제도상의 결함이 있었다. 요컨대 군역폐단은 조선 후기 사회적·경제적 변동에 따른 신분·경제 제도의 여러 모순이 확대되면서 심화되었다. 이러한 모순의 심화에 의해 군포수취는 경제적으로 극히 빈궁한 처지에 있는 농민들에게 집중되어 황구첨정(黃口簽丁)·백골징포(白骨徵布)·인징(隣徵)·족징(族徵) 등의 폐단을 발생시켜 사회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군역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군역제변통론의 하나로 효종대 이후 호포론이 대두되었다.
조선 후기의 호포론은 당파와 관계없이 많은 정부관료와 양반 지식인들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위로는 공경대부에서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관계없이 호를 단위로 군포를 부과하는 방안이었다. 당시 정부지배층과 양반지식인 사이에는 2차례에 걸친 외국의 침략으로 붕괴위기에 처한 조선 왕조의 재건을 위한 두 갈래의 개혁안이 대두되고 있었다. 첫째, 남인계열 중심으로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이를 바탕으로 부세제도를 이정(釐正)하려는 것으로 농민의 입장을 대변한 개혁방안이었다. 둘째, 부세제도의 개선을 통한 균부균세(均賦均稅)을 통해 사회안정을 이룩하려는 서인, 특히 노론 집권층을 중심으로 제기된 것으로 지배층 입장의 개선방안이었다. 호포론은 이 양쪽 모두에 의해 제기되었고, 당시 노론 집권세력이 제시한 개선방안 중 가장 진보적인 내용의 개혁안이었다. 호포론자들은 당시 양역이 신분관계를 반영한 인정(人丁)을 징포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우월의식을 가진 양반층이 하급신분인 상민들과 함께 포를 내는 것을 꺼리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징포대상을 인정에서 신분과 관계 없는 가호(家戶)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다.
즉 효종 때 북벌을 위한 군비를 확보하기 위해 1656년(효종 7) 원두표(元斗杓)가 모든 호에게 포 1필씩을 거두자고 한 주장과, 1659년 유계(兪棨)가 사족(士族)에게도 포를 징수하자는 의견 등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호포론은 주로 서인세력에 의해 활발히 전개되었다. 1671년(현종 12) 송시열(宋時烈)의 사족호포론을 비롯하여, 숙종 때 윤휴(尹鑴)와 이사명(李師命) 등의 호포론이 제기되었다. 특히 이사명은 호포는 신역(身役)이 아니라 호조(戶租)임을 강조함으로써 명분을 내세워 호포론을 거부하는 양반들을 정면 공격했다. 호포론자들은 양반층에게 군역면제 특권을 인정하면서 상민에게만 과중한 역을 담당시킨 것이 군역제의 모순이라며, 양반호에 대한 군역부과를 통해 군정의 폐단을 고치려 했다. 반면 양반지배층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이해에 손실을 가져오는 호포론에 적극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허적(許積)·허목(許穆)·권대운(權大運) 등 남인의 주요인물을 비롯한 호포반대론자들은 ① 양반층이 상천(常賤)과 같이 포를 내면 명분(名分)이 무너져 신분질서가 붕괴함으로써 중세국가의 유지가 어려워지고, ② 대다수의 양반들은 현실적으로 극히 곤란한 생활을 해 출포가 힘들며, ③ 양반사대부가 호포법의 시행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④ 호포법은 합호(合戶)의 폐단·계구등호방법(計口等戶方法)의 불합리 등 호포법 자체에 문제가 있고, ⑤ 고려의 쇠망이 호포법의 시행에 있었다는 것 등을 내세워 호포법을 반대했다. 그리하여 서인들의 호포론과 남인들의 호포반대론은 당쟁과도 얽히는 가운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양역변통논의는 1750년(영조 26) 종래 2필이던 양정(良丁)의 군포를 1필로 감하는 균역법으로 마무리되었으나, 폐단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가 없어 군민다소의 모순은 시정되지 않았다. 마침내 이러한 군역제의 모순은 1862년(철종 13) 삼남민의 항쟁으로 표출되었고, 정부는 동포제(洞布制)의 실시 등을 통해 모순을 시정하려 했다. 그러다가 고종초에 거듭되는 민란과 병인양요·신미양요를 겪으면서 군정의 문란을 제거하고 세원(稅源)을 확보하기 위해 1871년 대원군은 호포법을 실시했다. 1871년 3월 25일 대원군은 전국에 교서를 내려 호포법의 시행을 알리고 호포절목(戶布節目)을 작성하여 양반 사대부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호포를 부담하게 했다. 대원군이 시행한 호포제는 양반도 평민과 마찬가지로 군포를 부담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이 호포법이 완전한 균부(均賦)의 원칙을 적용한 것은 아니었다. 양반호와 평민호의 신분을 구별하기 위해 그 세액에 차등을 두었다. 어쨌든 호포법의 시행으로 인해 상민층은 경제적 부담이 감소되었고 양반층과 같이 군역을 지게 되었다는 대등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호포제를 환영했다. 이후 호포법은 갑오개혁기에 이르러서 신제도, 근대적 조세제도로서의 호포세·호포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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