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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효종대왕의 고난 [죽서 이민적 선생]
날짜 2010-04-10 08:15:40 작성자 이주관
조회 Hit :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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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상소문에 소개된 10년 볼모생활을 하신 효종대왕의 비통하심을 그린 죽서 이민적 선생의 시가 심금을 울림니다.
새삼 나라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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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숙종33년) 8월 8일
 
 
우의정 이이명(李頤命)이 16차례나 정고(呈告)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심수현(沈壽賢)의 상소로 인하여 상소하여 전날 논박을 당한 일의 전말(顚末)을 변명하였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엎드려 수찬 심수현의 소사(疏辭)를 보건대, 전의 일을 제기하여 신을 분의(分義)와 사체(事體)로써 꾸짖고, ‘곧장 구함(構陷)·무욕(誣辱)의 죄과로 몰아넣었다.’는 것으로써 신을 허물하였으니, 신은 두려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신을 장소(章疏)는 인구(引咎)함이 아님이 없었으니, 어찌 반 토막의 말이라도 배척하는 말이 있어 죄를 얽어 무욕하였겠습니까? 일이 이잠(李潛)의 상소와는 조리가 같지 아니하니 아울러 일컫고 혼동(混同)하여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신으로 하여금 입을 다물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게 한다면 바야흐로 짓밟아 유린했다는 배척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상정(常情)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또 주연(胄筵)에서의 거조(擧措)를 가지고 말을 하니, 이에 감히 정실(情實)을 궁구하여 말하겠습니다. 신이 지난 여름에 성조(聖祖)의 비사(批辭)를 써 주시기를 청했던 것은, 대개 신이 근래 동궁(東宮)의 빈료(賓僚)들이 친필(親筆)을 청하여 얻는 것을 많이 보았기에 망령되게도 여러 사람들을 따라 앙청(仰請)하여 장거(藏挙)14000) 의 영광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송(宋)나라 사람들의 글을 보았더니, 송나라 재상의 아들이 황제에게 선조 비석의 편액을 청한 경우가 많았고, 동궁의 관료들은 심지어 그 재실(齋室)의 이름을 써줄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양만리(楊萬里)의 ‘성재발(誠齋跋)’ 같은 데서 볼 수 있습니다. 신은 선왕(先王)의 대훈(大訓)은 사가(私家)의 비액(碑額)이나 재명(齋名)에 비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동궁께 진달하기를, ‘감히 보한(寶翰)을 청하오니, 은혜로 허락하심을 입는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할아비 이경여(李敬輿)효묘(孝廟)께 어수 지계(魚水之契)가 있어 일찍이 지극히 원통함이 마음에 있다는 하교가 있었으며, 또 「대인 선생(大人先生)」이라고 일컬으셨으니, 단지 신의 집안 자손만이 영광으로 느낄 뿐만이 아닙니다. 이는 황분 제전(皇墳帝典)14001) 과 함께 같이 천지에 빛나는 것이니, 저하(邸下)께서도 또한 이 의리를 일찍 아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등본(謄本)을 올리고자 하오니 써서 내려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하자, 동궁께서 즉시 올리라고 명하시므로 신이 소매 속에서 꺼내어 올렸습니다. 대개 우리 효묘께서 비록 큰 뜻을 품으시기는 하였지만, 밀물(密勿)한 유위(猷爲)14002) 외에는 일찍이 문자로써 아랫사람에게 조유(詔諭)하신 적이 없었고, 말년에 와서야 이 하교가 신의 할아비에게 비로소 미쳤던 것입니다.
고(故) 문정공(文正公) 신(臣) 송시열(宋時烈)이 일찍이 신의 할아비의 묘지명(墓誌銘)에 이르기를, ‘「지극히 원통함이 마음에 있다.」는 하교를 유독 공(公)에게만 명백하게 말씀하셨으니, 어찌 성문(聖門)14003) 의 3천 명 제자 가운데 유독 단목씨(端木氏)만이 다른 사람이 듣지 못했던 것을 들었던 경우와 같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또 일찍이 ‘지극히 원통함이 마음에 있는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至痛在心日暮途遠]’란 여덟 글자를 크게 쓰고 그 아래에 쓰기를, ‘위는 우리 효종 대왕께서 백강(白江) 이상국(李相國)에게 내린 비사(批辭)인데, 원래의 비사에서는 상국을 대인 선생이라고 일컬었다.’고 하였으니, 백강은 곧 신의 할아비의 호입니다. 〈이것을〉 신의 집안으로 보내 오랫동안 간직하도록 하였는데, 송시열은 이 의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 잊혀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신의 집안 자손으로 하여금 더욱 그 의리를 잊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뜻을 의탁한 것이 감개(感慨)하고 쓴 글씨가 기건(奇健)하여 신은 일찍이 오랫동안 전할 계획을 세웠고, 또 일찍이 들으니 중국 사람들은 무릇 조칙(詔勅)을 얻으면 반드시 금석(金石)에 새겨 문려(門閭)에 세워 둔다고 하였습니다. 또 들으니 가평(加平) 조종현(朝宗縣)의 사람으로서 의리를 좋아하는 자가 이 여덟 글자를 산벽(山壁)에다 새겼다고 하였는데, 대개 그 지명에 이 의리가 있음을 감격하였던 것입니다. 신이 이에 온 집안과 계획하여 송시열의 글씨를 모탑(模榻)하여 신의 할아비가 일찍이 거처하던 부여현(扶餘縣) 백마강(白馬江) 위의 서실(書室) 동쪽 바위에다 새겼습니다. 그런데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성조(聖祖)의 의리는 우주를 버틸 수 있고 군신(君臣)의 제우(際遇)가 또한 고금에 크게 뛰어나니, 단지 사가(私家)의 영총(榮寵)일 뿐만이 아니다. 천추(千秋)의 지사(志士)로 하여금 당일의 의리에 느낌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이다.’고 여겼고, 또 생각하기에 여덟 글자를 비록 돌에다 새기기는 하였지만, 전문(全文)을 오랫동안 전하는 것만 같지 못하였으므로, 매번 당세(當世)의 명필을 구해 다시 돌에다 새기고자 하였습니다. 신의 이 하교(下敎)에 대한 감격과 영광이 본래 지성(至誠)에서 나왔음이 이와 같았으므로, 주연(胄筵)에서 글씨를 청하며 이에 그 일을 언급하였던 것인데, 스스로 그것이 마침내 참월(僭越)로 돌아감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또한 일찍이 이 비사로써 전하를 위하여 연석(筵席)에서 외웠고, 또 장차(章箚)에 써 넣기도 하였으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명(聖明)께서도 또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도 신의 생부(生父) 대사헌(大司憲) 신(臣) 이민적(李敏迪)이 일찍이 효묘 때 책문(策問)에 대답하여 성조의 ‘동심(動心)’과 ‘인성(忍性)’을 논하면서 이르기를, ‘십년을 이역(異域)에서 보내셨으니, 만리(萬里)나 되는 사막이로다. 호드기 소리 북소리에 정(情)이 맺히고 산과 강은 눈에 슬프게 뵈이도다. 친히 융마(戎馬)를 따라 달리시며 눈으로 천지가 무너지고 찢어짐을 보셨으니 그 「동심」, 「인성」이 어찌 진후(晋侯)의 간난(艱難)에만 그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효묘께서 고시관(考試官)과 대신(大臣)에게 이르시기를, ‘그 글이 사람을 크게 감동시킨다.’고 하셨습니다. 성조의 지극히 원통하심을 신의 아비가 능히 말하였기 때문에 성심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신이 지난해 사명(使明)을 받들어 요동(遼東)·심양(瀋陽)을 지나며, 성조께서 엄휼(淹恤)14004) 하신 땅을 보았는데, 세월이 또 한 주기(周期)를 넘었으므로 크게 성교(聖敎)와 신의 아비의 글을 외며 얼굴을 가리며 울고 슬픈 감정에 젖었습니다. 더욱이 우리 성상께서 단(壇)을 쌓고 향사(亨祀)하신 거사는 앞 세상이나 뒷임금의 있지 아니한 바이며, 지극한 정성과 대의(大義)는 천고에 아득히 뛰어나신 것이니, 열조(烈祖)의 큰 뜻을 빛낼 수 있고 천하 후세에 찬사가 있을 것입니다. 신과 같이 둔하고 못난 사람은 비록 능히 위로 소술(紹述)한 성덕을 기리고 아래로 부조(父祖)가 남긴 뜻을 따라가지 못하나, 진실로 우리 동궁으로 하여금 깊이 연익(燕翼)14005) 의 계획을 알도록 하고 문조(文祖)14006) 에 상밀(詳密)한 의리에 그으기 붙이고자 하였으며, 신의 사사로운 분수에 있어서도 또한 빛이 있는 것입니다. 구구한 정성은 실로 이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거조(擧措)의 전망(顚妄)됨을 신 또한 스스로 책망하여 일찍이 뒤미쳐 뉘우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논의를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유신(儒臣)의 말이 지금 또 거듭 배척하므로 감히 끝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실로 본정(本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글씨를 청한 위절(委折)을 지금 비로소 상세히 밝혔으니, 유신의 소어(疏語)를 깊이 혐의할 필요가 없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0책 267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 *역사-전사(前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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